인천칼럼

어처구니를 깎으며

濟 雲 堂 2008. 12. 3. 19:09

 

 

 십년 전,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살림도구 몇 가지를 내게 주셨다. 당신 자녀들이 있음에도 굳이 나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나가야(長屋)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신흥동으로 시집와 50여년을 한 곳에서 살아오신 어머니는 뒤뜰 한 구석에 쌓아둔 살림도구 가운데,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맷돌과 방자 세숫대야 그리고 다듬잇돌을 가리키며, 당신이 50여년을 오롯이 써 왔던 것이라면서 대뜸 가져가라 하시는 거였다. “네 놈이 이런데 관심이 많지? 네 놈이라면 내 새끼들보다 더 잘 보관해 줄 것 같아서”라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영면하시고 말았다. 만성적인 불경기의 암울함이 일상에 젖어 있다보니 불현듯 지난 시절 좋은 기억들이 모닥불처럼 살아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추억으로 다반사 떠오르는 요즘의 단상이다. 친구 어머니의 말마따나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맷돌과 세숫대야를 볼 때마다 남긴 말씀을 적이 잊을 수 없는 건, 모종의 책임감과 더불어 당대의 지난했던 삶들을 오래오래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 시대 어머니들의 당부라는 생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을 비롯해 구도심이 한 세기에 사반세기를 더한 세월의 더께가 면면이 묻어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전국 어느 도시를 훑어보아도 인천의 구도심만큼 근대사의 흔적들이 녹록하게 배인 공간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물론 군산, 목포, 강경, 마산, 부산 등 개항장의 일부가 근대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인천만큼 역사, 문화적 자산을 풍부히 간직한 곳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근대건축, 철도, 조계지, 교육, 종교, 간척, 스포츠, 자동차, 화폐, 우정국, 출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삶의 총체성이 집약적으로 형성된 공간이 바로 인천이기 때문이다. 박제됐거나 전리품처럼 몰아넣은 여느 박물관이 아니라 그야말로 평면에 깔린,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란 이야기이다. 그랬던 구도심에 획기적인 변화의 조짐이 급물살 타듯 두드러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예촌’ 조성사업이다. 구한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지계확장을 꾀하며 인천 앞바다를 매립했고 그 터전위에 창고들을 세웠는데, 낡고 부식된 창고들을 새롭게 꾸며 ‘예촌’ 즉 미술 문화 공간으로 바꾼다는 계획이었다.

 

 ‘예촌’에 대한 시민적 열망이라고 선 듯 말하기엔 머쓱했지만 일부 식자층이 기대했던 근대 건축물 활용에 합리적인 수순을 밟는 노력들이 심심찮게 기대되었다. 그러나 운영주체에 대한 논란과 ‘예촌’이란 명칭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사용자와 전체운영의 틀 거리는 오리무중처럼 한 치 앞이 선명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31일 자로 준공되었고 운영주체가 인천문화재단으로 결정됐다는 소식, 아울러 ‘예촌’이라 가칭했던 것도 ‘인천 아트 플랫폼’이란 낯선 이름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앞서 시민적 열망이란 말머리를 내세우기 머쓱하다는 표현에 맞게 느닷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인천 시민 공모자의 대다수가 ‘인천 아트 플랫폼’을 선호했다는 내용이나 ‘중구 미술 문화 공간 활성화 방안’ 연구결과 인천문화재단이 운영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42%가 나왔으므로 운영주체가 결정됐다는 발표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아무래도 시민에 대한 정의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기득권자들에 의한 편향적 결정들이 고스톱 판에서 짜고 치는 듯한 냄새를 떨쳐버릴 수 없음이 더 깊어서인지 이제부터 시민에 대해서는 ‘좀 더 낮아질 수 없는 자’들이라고 정의 내려야겠다. 여하튼 내년 9월에는 창작, 전시, 교육, 커뮤니티 등을 총괄해 레지던스 개념의 예술 공간이 분명히 탄생할 것이라 한다. 멍석도 깔리고 맷돌도 준비됐다고 한다. 근데 어처구니가 없다. 누가 손잡이를 깎고 녹두를 타고 빈대떡을 구울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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