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하며 사는가.
사람은 대자적 존재다. 익명이든 기명이든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나’다. ‘나’는 ‘너’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고 ‘나’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또한 ‘너’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지 모른다.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곧 ‘대아大我’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불변하다. 좀 진부한 감이 들지만, ‘큰 나’는 ‘큰 너’와 동일하며 최종적으로 ‘우리’로 귀결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장황스럽게 글머리를 올려본다.
불통으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폭증하고 있다.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불리는 우리 현실에서 밑도 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실상은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절박한 수준에 이른다.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사회 또는 사회 대 사회가 외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인간 대 자연이 이제금 불통의 고리를 맺으려 하고 있어 그 아픔은 더욱 깊어진다.
한낮의 기온이 한여름 삼복더위에 버금가는 추석 목전, 재래시장 상인들의 넋두리를 한 귀로 흘려보내듯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대형할인매장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한술 더 떠서 각종 케이블 방송 판매와 인터넷 판매의 기승으로 재래시장 상인들의 한숨은 끊일 날이 없다. 각종 연극제와 음악제, 마당극 등에서 예술 혼을 불사르던 예술가들이 빈처를 꾸며 가을을 만끽했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격세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방정부에 의한 상업적 구도로 조직된 ‘축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의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재 우리의 살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에 현실의 생채기는 더욱 심각하다.
암(癌)이란 글자를 유심히 살펴본다. 산처럼 겹겹이 쌓인 질병 즉, 어느 무엇이든 간에 소통의 기미가 전혀 없는 첩첩산중 같은 아픔이란 뜻이다. 인체 조직에서 다른 세포조직과 교류하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거만하게 자신의 배만을 채워 결국 다른 세포 전체를 죽임에 이르게 만드는 치독을 암이라 부른다. 불통의 전형이다. 내면적 가치가 교육되어지지 않고 외형적 가치가 숭앙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과연 통(通)은 부재하는 것일까. 만일에 ‘천연기념비’적이란 단어가 허락된다면, 물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기념비적 단어의 반열에 올려야할 단어 몇 가지를 수순 없이 떠올려 본다. 양보, 자기희생, 헌신, 손해, 봉사, 적덕(積德), 용서, 이해, 관용, 겸양 등의 단어들이다. 이해 각도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바뀔 소지가 많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공집합으로서 모아지는 개념은 ‘준다’는 것에 있다. 준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을 나눈다는 의미와 함께 영혼의 교류를 바란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행태소다. ‘천연기념비’적 단어의 제안은, 현재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다. 같잖은 말이다. 갖춘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굳이 아닌 말을 어거지로 둘러맨 데에는 불통하며 사는 우리의 현실이 하도 절박해 보여서이다. 사람은 소통하는 존재이다. 삶과 앎을 나눠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 앎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다시 맞는 한가위다. 도시는 점점 몸집을 키워나가고 산과 들과 내는 그만큼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누구나가 이상기온을 말하지만 그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재래시장 상인들의 푸념은 더 이상 방관의 대상이 아니고 상업적 논리에 의해 판단되는 우리들의 이웃이 아닌 것이다. 힘 있는 자, 가진 자가 ‘통하기’에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야할 때이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은, ‘나’가 ‘너’여야 하고 ‘너’가 진정한 ‘우리’가 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묻는다. 통하며 사는가.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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