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15인의 야마가탄 Yamagatan

濟 雲 堂 2008. 12. 31. 01:02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내 작은 도시라 할 일본 야마가타 현(山形縣) 야마가타 시에서 손님들이 오셨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부터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구성된 모둠 방문객이었다. 대부분이 한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었으니 인천은 오죽하겠냐마는 한국에 대한 이해와 식견은 여느 방문객과 좀 다른 분위기였다. 인천에 오기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거하고 계신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명동과 남대문, 인사동 그리고 학교시설 등을 이미 섭렵하고 온 터였기에 첫 방문치고는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야마가타 현은 야마가타 시를 비롯해 43개의 시정촌(市町村)으로 구성된 인구 126만 여명 규모의 중소자치구역이다. 1억 3천여 명에 육박하는 일본 인구 가운데 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작은 현(縣)에서, 게다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야마가타 시에 사는 일본인 15명의 인천방문은 그래서 더 특별난 것이었다. 올해로 세 번째 한국을 방문한다는 다구치(田口忠宣) 씨는 한국방문 첫 해에 무작정 독립기념관을 찾아가 지난 식민지 역사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러 왔다고 밝혔던 일본지리교육연구회 전국위원이기도 했다. 수치상으로 천만 분의 일의 비율에 불과한 이들 방문객의 전면을 살펴보니 교육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이었다.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퇴직교사 등의 모임인 야마가타 ‘교직원조합’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야마가타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는 고길희 박사의 간청에 의해 성사된 인천 행이었는데, 생면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생소하기 그지없는 인천의 문화 환경을 단 하루에 설명한다는 게 여간 골머리를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시발지인 인천역을 일본 요코하마와 비교해 설명했고 차이나타운, 연초제조지, 창고시설, 청.일조계지, 일본은행거리와 각국공원이라 불렸던 자유공원 등 개항 초기 일본인들이 살았던 공간들, 일제강점기에 인천이 어떻게 병참기지로 변해가는 지를 끝으로 단박하게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중국요리는 인천을 찾는 외래 방문객들에게 참으로 매력적인 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비싸기로 소문난 일본의 중국요리에 넌더리가 난 일본사람이라면 삼분의 일 가격이 채 안되는 요리를 푸짐하고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차이나타운에서의 식사는 가히 환상적인 것이었다. 뱃속이 따듯해지고 일면식이 재차 거듭되면서 국적과 민족의 경계가 슬그머니 녹아내리고 있었다. 명함을 돌리고 사진을 찍고 술잔이 부딪쳐감에 따라 한 시대를 고민해왔던 양국의 이질감은 시나브로 인간문제라는 대전제 속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양국의 역사관계에 대한 오해와 오역의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가능성을 공유하게 된 점은 높이살만 하다고 자평해 보았다.

 

 

 엔고의 여파로 비교적 손쉽게 한국 방문의 기회를 갖게 된 일본사람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말마따나 인사동과 명동 그리고 엔간한 목욕관련 서비스 시설과 간단한 치료시술을 값싸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일본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연일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 아닌 호황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지나친 경제논리 중심의 이미지즘이 노출된 것은 아닌지 한편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식이 지나치게 강조돼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교육받아왔던 우리 세대의 역사 인식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적확한 판단을 통해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 또한 우리세대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즈음에 일본 방문객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어려운 인천에 일본 소도시 야마가타 지성인들의 방문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15인의 야마가탄((山形人 Yamagatan)이라 감히 부른다. 국지적 경계와 역사곡해를 뛰어넘어 진실을 찾아 인천을 방문한 ‘교직원조합원’들께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 수정(修正)합니다=

 올해로 세 번째 한국을 방문한다는 사토(佐藤光康) 씨는 한국방문 첫 해에 무작정 독립기념관을 찾아가 지난 식민지 역사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러 왔다고.......이고요.

...... 밝혔던 일본지리교육연구회 전국위원이기도 했다. 에서 전국위원인

다구치(田口忠宣) 씨와 혼동하였음을 알립니다. ^ ^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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