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다리와 미니 골프장. 너부죽한 양재기에 물 한가득 받아 놓고 물방개를 풀어놔, 자신이 정한 숫자가 그려진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면 상품을 받아내곤 하였던 물방개장수. 거뭇한 보리 물에 수박 몇 조각 띄워놓고 투명한 호스를 늘어뜨려 컵에 따라 파는 냉차장수 등등의 풍경들이 소년기의 자유공원에 대한 기억들이다.
조악하기 짝이 없던 야조사와 맥아더 동상 뒤편 벚나무 사이 길에서는 검은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알 수 없는 뭔가를 늘 도모하기도 했었다. 햇볕이 직사로 내려 꽂히는 남쪽 등성 한가운데에는 상아색으로 물들 박물관이 근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정문을 따라 내려앉은 횅댕그렁한 계단에서, 길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바다의 몸집은 점점 작아져버리고 붉은 벽돌을 두른 담장은 더욱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던 시절이었다. 담벼락에 박혀 있던 작은 쪽문과 둔중한 후문은 늘 건장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소년기의 기억을 어둡게 지배했던 붉은 벽돌담 안에 인천 시장의 관사가 있고 자유공원에 오를 때면 의례히 피해 가야 하는 곳이었음이 염두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7년 전의 일이다.
1966년부터 2001년까지 35년간 시장관사로 사용하다가 인천 시민의 품에 안긴 데에는 최기선 시장의 공약에 따르는 바도 있었다. 너른 풀밭과 잘 꾸며진 정원수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바위 등으로 계단을 놓고 단단한 육질을 평탄하게 조탁해 놓은 기단석과 멋스러운 기와집. 철옹성 내지는 아방궁에 견줄 만큼 어린 가슴을 기묘하게 짓누르던 관사가 인천 시민의 발걸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는 사실이 되었다. 그만큼 시장관사는 응봉산에 함께 있는 자유공원과는 판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자웅동체였다. 그런 공간을 인천 시민에게 되돌려 준다는 발상의 신선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욱 구체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 바로 역사자료관이다.
역사자료관의 개관으로 인천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목말라 하던 시민의 갈증이 해소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보답하듯 불모의 밭으로 오해를 받았던 인천이란 도시에 엄청난 분량의 역사의 꽃을 틔우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삼십 여권에 달하는 자료집으로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가려진 장막을 거둬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의 보물 창고를 물증화 시키는 사역을 굳세게 해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7년이란 세월을 불철주야 연구에 열성을 발휘한 두 분 강 박사와 인천시의 막대한 지원도 높이 평가받아야하지만 무엇보다도 십만 여 인천 시민의 애정 어린 발품이 더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항간에 이런 역사자료관을 두고 떠도는 괴 소문이 무성하다 못해 시껍하다. 외국인 방문자 숙소로 만든다든지 한옥 체험을 위한 전시관으로 만든다는 등의 말들이 시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가당치도 않지만 현재 역사자료관은 지리적 접근의 안정감과 장소적 상징성을 무난히 소화해냈을 뿐더러 인천 역사 연구의 사랑방으로 이미 튼실하게 시민 사회에 뿌리를 뻗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남의 목숨도 귀하게 여긴다는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마디 더 거들자면 역사자료관이 과거에 시장관사로서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역사자료관은 일제의 한반도 경제침략의 총아로 불렸던 코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助)의 별장이었다. 1891년 인천 미두취인소의 중역을 시작으로 조일양조(주), 조선신탁(주), 맹중자동차(주), 월미도 유원회사, 조선연초(주)의 중역을 한 인물로 1931년 사망하기 전까지 인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경제 침탈에 앞장서 부를 축적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역사자료관의 현재 위치가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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