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배다리 아리랑 (나와 배다리3-2)

濟 雲 堂 2007. 7. 2. 01:21
 


우리는 관계의 병을 앓고 있다. 병 치고는 꽤 더럽고 치사한 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갈비뼈가 으스러져 눈에 보이는 아픔의 정황증거가 충분하다면 차라리 애처롭기라도 하지. 그런데 이 놈의 것들은 심장 가까이서 헐떡대는 것들이라 도무지 판단의 근거가 제대로 서지 않을뿐더러 부조리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깡패 같은 심보여서 여간해서는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소통이 안 돼서이다.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철학자 마틴 부버(1878~1965)가 게워낸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말을 게송(偈頌)처럼 읊어본다. ‘나와 너’가 소통되지 않는 세상에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의 처신에 대해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은, 사기에 나오는 위무공의 경구를 빌어 경고하신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골방에 앉아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이 모든 얘기의 주제는 존재에는 책임이 따르고 생존하는 데에는 관계의 철학<通>이 우선 정립돼야 한다는 말이다. 뭐, 그렇게 믿자.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배다리는 지금 백 년 동안 잘 구워낸 백자를 한 방에 날리려고 모종의 꾀를 부리는 잔당들이 골방에 쳐박혀 획책하는 모양새이다. 백자를 한 방에 날려 보겠다고 하는 치기 어린 분이나 몸땡이가 으스러지고 두 주먹이 으깨진다 한들 일편단심 대구리 쿡 처박고 막겠다 하시는 님들의 안타까운 대치가 안쓰러운 형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자로서 그 꼴값을 못하게 되면 사금파리가 된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모든 완성품은 미완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고 그 속성에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으므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보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책무가 뒤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이고 우리민족인 것이다. 너는 하고 나는 막고가 아니라 소통을 통해 난관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우리의 숙제이다. 헌데 문제다. 무지렁이 대다수의 주민들이 외려 이성적이며 평화적인데 비해 시행정부를 비롯해 도공은 이성과 평화를 가장한 개발과 범세계 대열에 줄 맞춰야 한다며 교묘한 줄다리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없으므로 소통이 안 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너는 너고, 나는 나’를 만들고, 이러다가 우리, 날카로운 경계선에서 심장과 같은 색깔을 띈 액체라도 흘릴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이 즈음에, 있어서 좋았던 길과 있어서는 안 될 길, 있으나마나한 길과 꼭 있어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길도 길이지만 존재해서는 안 될 길을 만들지 않는 길도 길이라는 것을... 돈오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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