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나와 배다리 2

濟 雲 堂 2007. 5. 20. 00:16

 

나와 배다리 2.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고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했던 1895년. 황량하기 짝이 없던 싸리재 아래쪽 볼록 튀어나온 능선 언덕배기에 ‘협률사’란 공연 시설이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다. 한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이라는 별명을 운명적으로 달고 다니게 되는 순간이다.

 

 정치국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규모 공간인데,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일약 ‘스타’로 발돋움 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으니 엔간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 하루아침에 명망(?) 있는 그룹의 반열에 들어선 인물이 나타났다고 개항장 일대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떠꺼머리총각 엿장수”였다느니 “일본 말에 능통한 사람”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소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었다. 또 어느 점잖은(?) 소문은 물설고 낯 설은 타지였을 인천 땅에 발을 디디고, 붙박아 사는 데에 여러 모로 입지에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서 상설 공연장을 차린 게 아니겠냐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흘러 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협률사’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치국은 이미 부산의 동래(초량) 일대를 거점으로 부를 축적한 객주로서, 원산을 비롯해 연안 지역의 개항시장의 반관반상의 지위를 지닌 물류 책임자로서 어지간히 부를 지닌 사람이었다.

 

 인천 정착 1세대 가운데 비교적 후발주자였던 그가 인천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땅이 남보다 많았다는 데에 기인한다. 예나 제나 땅에 대한 소유 규모를 보고 부를 판단하는 것은 크게 다를 바 없다. 내리교회 아래 신포 문화의 거리 일대, 조선말 내무대신 조병태 가옥과 그 건너 능인사를 포함한 싸리재 일대, 속칭 모모산(돌산=광성학원) 아래 보각선원 일대 등의 땅을 소유한 것을 일례로 본다 치더라도 그의 재산규모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와 배다리 2> 라는 주제에 걸맞지 않게 정치국이란 사람을 거론하느냐 말씀하신다면, 결론적으로 보각선원 이라는 대목과 연결되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다. 인천의 인문 지리도를 만들어 보면, 마치 각기 다른 가지로 뻗어 났지만 뿌리에서 빨아올리는 자양선을 타고 한 기둥을 거쳐 생장하는 나무의 동질성을 갖추고 있는 공간이 바로 인천이라는 점을 말씀드려야겠기에 서설이 좀 장황했음을 이해 구하고 싶다.

 

 거두절미하고, 보각선원 자리는 일찍이 박창례라는 분을 통해서 인천 야학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인데, 어찌어찌해서 정치국의 땅에서 무상임대로 야학을 꾸려오다가 여차저차해서 고구려의 개척자 ‘동명성왕’ 두 글자를 따 ‘동명’ 초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는 등의 얘기로 접어들어 가면 그 접히는 고리의 중심에 배다리가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제 강점기의 야학은 사회 변혁을 태동케 했던 도시 노동자들의 사상적 수유 공간이었음을 다들 아시는 바. 이를 쫓았던 늙다리(?) 학생들은 현재 배다리 관통도로 공사로 밀어버린 문화극장 터(피카디리 극장) 옛 성냥공장의 여공들과 중.동구 전역에 고루 산재해 있던 정미소의 선미공(쌀 고르는 잡역)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이들의 활동 무대는 직장과 배움터가 공존해 있던 배다리였으므로 배다리 역사의 다각적 인식 가운데 거시적 비교를 놓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 본다. 여하튼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배다리는 민족의식의 중심지로 도시서민의 생활현장으로써 그 기틀을 다지게 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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