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스승열전 1 -김 종현 씨-

濟 雲 堂 2001. 6. 25. 11:18
우리의 마음속 동산으로 초대되는 스승을 찾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양지바르고 바람 잘 드는 풀밭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골고루 내리 쪼이는 태양 빛이 제법 따갑다고
비켜 지나가는 나무 그늘로 자리를 옮겨다니며
웃음을 주고받을 만한 마음 속 스승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장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흙장난을 하던 어린 시절에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오라지 나를 거머쥐는 무수한 눈길들이 나의 어머니 아버지로 대신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동네의 형들과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어른들 그리고 내게 최초로
책을 선물하여 주신 큰 형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들조차도 어찌 보면 나의 스승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유난히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했던 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학교 담장 밑에 아카시 나무숲을 우연히 걷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앉아 있기 좋은 풀 섶을 찾고 있었다.
높다란 곳에 아무렇게나 지은 까치집이 눈에 들어오고
간혹 인기척에 놀라 바삐 날개짓 하는 참새도 더러 보이곤 하였다
둘 째 형수님이 싸준 네모 넓적한 도시락은 채 식지 않아 모락모락
김을 피우더니 누가 볼세라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그 때,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고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쓰신 나이 지긋한 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중풍을 오래 앓으셨는지 걸음걸음이 위태롭게 보였지만
결코 넘어지거나 부딪치지는 않으셨다
10년을 그렇게 앓아 오셨다 했다.
그 분이 아카시 나무를 지팡이 삼아 내게 다가오던 오솔길은
오로지 그 분이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 높이의 나무 등걸마다
매끄러운 표면이 군데군데 윤이나 있어 보였다
그 길목에 내가 앉아 있던 거였다.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어찌 되었든지 간에 거의 매일을 그 분과 도시락을 나눠 먹게 되었다
어쩌다 오지 않으셨을 때에는 마음이 왜 그리도 허전했던지...
우리는 여름 방학이 끝날 때까지 거의 한 달을 그렇게 보내었다
그 분을 통해서 나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 만나고 일 주일 가량은 거의 당신이 살아오신 얘기들로 이루어졌지만
당신의 얘기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싶으셨는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자는 제안에
나는 뭔지도 모른 채 흔쾌히 대답을 했고
공교롭게도 처음 정한 책은 난생 처음으로 접하는 철학 책이었다.
첫 권은 안병욱 교수의 '현대사상'이라는 책이었다.
두 번째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는 않지만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느 질송'이었고
세 번째는 보에시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우리는 여름 한 철을 그렇게 보냈다.
내 평생의 골머리란 골머리를 통째로 쏟아 붓던 시기가 되어버렸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 것은 엄청난 생각의 자양이 된 다시없는 기회가 되었다.
얼마 안 돼 개학을 하고 나서부터 친구는
"너 철학자가 됐어! 진짜로 말야! 개똥철학자 말야!"
이렇게 우스개처럼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김종현.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다만 미국으로 지병을 치료하러 가셨다는 얘기만 풍문으로 들리고 있을 뿐.
나와 동갑내기인 딸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법한데 말이지
내 마음 속 양지 바른 동산에 젖은 풀 뙈기를 피해
앉기 좋은 너럭바위가 하나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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