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안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빛의 신세를 지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별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는 새벽에 일어나
철통으로 무장한 대문을 열고 길을 박 차는 순간부터
자정에 이르러서야 들어서는 아파트 입구에 이르기까지
하루 안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빛으로부터의 빚을 청산하기가 여간해서 쉽지가 않습니다.
육신은 빛의 아우성을 질척거리고 어둡게 흐르는 내실로
조용히 타이르듯이 초대하고 뇌수의 혼찌검을 받아 自靜이 될 때까지
기력이 쇠진할 때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거대한 빛이 시간의 바다로 침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둠이 본질인 인간은 빛의 추억을 떠올리며 빛을 만들어 내고
빛 없이는 못살겠다고 불을 피우고 그 빛이 잉태한 불로
가증스럽게 또 다른 빛을 만들어 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잃어 이미 짐승적인 본능에의 의존률이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빛으로 귀속이 된 것도 어둠으로의 회귀도 아닌
어정쩡한 인간의 굴레 속에서 여전히 갈등하는 갈대로 남아야 했습니다.
우주의 절대 부피는 빛보다 어둠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신체를 보더라도 빛을 빛이라고 확신하는 믿음 구조를 가진 것은
유일하게도 눈 밖에는 없고 나머지는 모두 어두운 껍질에 쌓여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은 보여짐입니다. 보여짐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통로임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하나씩, 하나씩 제 자신을 밝혀 나갑니다.
어둠이 드러날수록 미궁은 깊어지고 육신의 신비는 우주적 에너지의 움직임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빛의 세계에서 과연 빛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는가 의문이 듭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눈을 비집고 들어오는 풍경들은 나의 삶에 있어서
인간적(이성적) 본능과 자연적(우주적) 본능 사이에 어떠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고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도상에서
빛에 너무도 많은 치우침으로 해서 편견을 갖고 살지는 않나? 반성해 봅니다.
밝음의 깊이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어둠의 깊이는 측정 불가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간을 자연(우주)으로 향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굳이 '가이아' 이론을 거론치 않더라도 이미 치우침의 폐해는 내면 깊숙히 배어나
소위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환경을 해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결과가 나날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이전에 내면의 구조를 따라서 가만히 흘러가 보는 것
감성과 오성에 제 자신을 맡겨 보는 것
나아가 우리에게 투영되는 빛이란 존재는 과연 우리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사는 데에 있어서 빛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투명한 빛에 너무 많은 현실들이 가리워 지는 것은 아닌가?
전원을 꺼 봅니다.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고, 전구의 불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TV 수상기에서 극적인 사람들이 사라지고, 통화를 하던 상대방이 이내 사라지고 없습니다.
빛이 없으므로..., 더듬기 시작합니다.
꿈틀거리는 저 궁금증의 배후는 무엇일까?
움직이는 저 살아서 숨을 쉬는 저 이는 누구인가?
이토록 세상을 깜깜하게 만들어 대는 어둠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나인가? 무엇인가?
다시, 전원을 켜 봅니다.
빛과 어둠의 틈에서 뇌수를 자극하는 이 절대 공간의 한 때.
인생이라는 공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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