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떡 방아간 풍경 (이야기 하나)

濟 雲 堂 2000. 11. 21. 11:12
떡을 찌러 할머니 한 분이 오셨습니다

시월 상달이라 팥 시루떡을 쪄서 터주께 기원을 하려고 하는데

각별히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고 주문하십니다.

보일러를 켜고 김이 모락모락 펴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행여 검댕이라도 떨어질까 노심초사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찹쌀과 멥쌀은 반반씩 섞었고, 소금은 넣었다고 했습니다.

굉음을 내며 쌀의 낱알들이 허옇게 부숴져 넓은 대야를 채웁니다.

네모난 시루에 팥가루를 깔고 쌀을 얹히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말을 끊지 않았습니다.

네모진 시루 안에서 김이 오를 무렵... 이상하지?

김이 한 쪽으로 치우쳐 오르기 시작하더니, 한 켜 한 켜 올리는 떡의 전면을

외면하듯이 덜 익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이 흐르고 또 한 시간이 흐를 무렵

애가 타던지, 급기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는 할머니는

당신들의 무성의가 자신의 행을 불행으로 여물게 한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 때

나이가 더 드신 할머니가 방앗간으로 들어오셔서

지난번에 해주신 팥 시루떡이 너무 맛있어서 다시 맞추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눈이 똥그랗게 부어 오른 그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서 떡을 쪄도 떡이 안 익으면 그 게 바로 더할 나위 없는 재수죠! 그러니 그 성의만으로도 댁 네는 복 받을 겁니다.

마음의 진정을 찾은 할머니 댁으로 떡을 가져다 드린 시간은 그로부터 세 시간이 훨씬 흐르고 난 후였습니다.

물론 떡은 죽처럼 되었고 당신이 섞었다는 쌀은 모두가 익히기 어려운 찹쌀들 뿐이었음을 할머니 댁으로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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