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단합과 단결된 모습으로 구 시대를 일깨우고, 새롭게 펼쳐지는 새 세기를 맞이하자고, 독일의 교육자이며 철학자인 피히테는 '독일 국민(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격변하는 70~ 80년대의 젊은 벗들에게 한국의 철학자인 김동길 선생은 역시 비슷한 題下의 '한국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미려한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역설하는 내용의 주요 골자들은 일반화되어 있는 현실과 이상과의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느냐에 그 주요한 내용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청년문화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1980년대는 역사적으로나 정신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발빠른 전환기적 양상을 띄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2000년대의 시점을 파격이니 문화적 충돌에 의한 문화적 아노미 현상이니 하며 삶의 질적 차이점들을 구획하는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른 바 80년 생들을 전후로 하는 세대, 다시 말해서 현재의 청년 문화를 주도하는 계층들은 강력한 개성과 더불어 독립적인 자아를 있는 그대로 표현 할 줄 아는 법을 자생적으로 터득하는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생을 전후로 규정짓는 것에 대해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위 아래로 3년간의 편차를 공유하는 이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거개가 영상 문화라는 대중 매체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서, 오늘날의 대중적 가치를 철저하게 개별화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생적으로 터득했다고 하는 말에는 이들 세대의 부모가 격변하는 시대적 산물들에 대해 대응할 기력이 없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지만, 역으로 사회가 세대간의 결합을 방조하거나 교육 일반의 정서를 체계적으로 갖추지 않았음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구조의 사회체제를 지향한다는 것에 일련의 문제점들이 도출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독립적인 자아의 개념은 날로 확대되고 비대해져 가지만, 사회적인 자아는 나날이 축소되고 왜소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문제점들이 극대화되는 시점에서, 개인은 소외의 그늘을 피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무력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제도적으로 갖춰지지 않은 가운데 개인은 여전히 무기력하게 피해자의 구실만을 강요받을지도 모를 상황으로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반면에 이미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반사회적인 개인의 집약체로써 공허한 삶에 대한 미련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외롭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터넷 사용의 폭증은 우리의 시대성과 세계화로 가는 지수를 말해주는 잣대가 되었고, 소위 고독이라는 질병을 하나씩 가슴에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휑뎅그렁한 객체적 삶을 철저히 영위해야 만이 현대인이 되는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육질의 언어가 사라지고 질감 있는 삶의 고백 대신에 영상으로 드러나거나 문자화된 보이지 않는 실체에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는 환경은, 자기 주장에 대한 책임감과 더불어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결코 많이 들지도 않고, 편하고 쉽게 단락지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남고, 가상의 사회 구성체에 대한 자기 표출이 일회성으로 충분히 자신을 알릴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점조직의 극대화된 힘의 세력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과시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인터넷의 폭증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면, 수천 만 인구의 개별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이 가치적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현대 사회의 주종이랄 수 있는 최첨단, 초고속, 최신의 발전 지향점들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면 넘어 설수록 뼈아픈 미래의 탈가치적 산물들을 처리해야 하는 데에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 사조의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청년 문화라고 하는 것은 지극한 위험 수위에 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청년 문화의 일반적인 행태를 매도하거나 축소 왜곡하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구성비의 측면에서 일탈적 가치를 지닌 지수 차원에서 비율이 획일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 행위를 할 수 있는 2~30대의 노동력을 갖고 있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노동력은 전 세계 191개 나라 중에서 중 하위 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기형적으로 늘어나는 서어비스업의 증대는 생산 제조업의 기반을 도외시한 절름발이 식의 경제구조임을 감안 할 때, 그에 따르는 경제 파단과 더불어 미래 산업의 희망적인 요인들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6~70년대의 산업 개발의 중점 목표들과 그 시대를 겪은 부모들에게 강요되었던 자본주의의 최대 가치는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남 보다 잘 사는 것. 자기 이외에 남은 모두 경쟁 상대였고 암묵적인 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의 교육과 경제는 지표 지상주의를 채택하게 되고 성과주의와 결과만을 다루는 소위 엘리트 양성에만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생들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모습들은 오늘날의 비균형적인 문화적 습성들로 여실하게 나타납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말에 출생한 사람들과 대비하면 이 세대는 엄청난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분산되어 있고, 뚜렷한 자기 정체성에 비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약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되, 외래적 인자에 의해 자신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행위에 있어서, 모방은 편견에 지나지 않을 만치 대범한 패러디를 추구하는 것이 특성이기도 합니다. 私塾이든 公塾이든 개념을 떠나 스승은 없고 내재적인 스승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창출에 발군의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까지의 개념적인 말들은 자칫 부정적인 말들의 나열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개설적인 논지들이었지만, 그 안에 배인 긍정의 부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앞으로의 질문과 대답이 예상될 것이라 믿습니다.
현재적 삶의 최대 가치적 무기는 과거와 현재로 이행하는 과정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습니다. 과거 우리의 발전은 위상으로써 드러난 전시적 발전이었지 결코 삶의 질에 있어서 소위 선진 자본 국가의 문화 행태처럼 균형을 위한, 조화를 위한 개선의 묘를 살리고자 함이 아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고창신.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굳이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훌륭한 문화 자산들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세계의 문화 변동 이론은 과거로의 이행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에, 잊혀진 것들을 새롭게 접목하느냐에 신세계적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현세적 삶이 병약화 되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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