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신화에 갇힌, 길몽을 꿈꾸며

濟 雲 堂 2000. 10. 3. 02:03

나의 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시계가 있습니다.
감긴 태엽의 역 방향으로 풀어 나가는 이 시계는
태어남과 동시에 작동하여 생체 운동이 끝날 때까지 시한부적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시간의 비밀스러움은 셈으로 이루어지고 셈은 곧 사물의 나이로 일컬어지고.
오래될 수록에 공간적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셈을 셀 때마다, 시간은 점점 제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이상스럽게도 그 셈으로 만들어 지는 공간은 셀 수록에 알 수 없는 시간의 더께로 가득 차 있음을 차차 알게 됩니다.

나무가 아주 작은 묘목이었을 때에는, 그저 여느적 삶의 형태소를 띄게 되어 죽게 되든지 살아서 거목이 되든지 간에 별 의미 없이 받아들여 잠재된 판단에 맡겨 버리게 됩니다.
잠재된 판단이라는 시간성에 우리를 몰아의 경지까지로 안내 받는 현실은 지나온 기억들을 더듬어 내는 자아 구조의 진행 상태가 얼마나 건실했던가를 확인 받고 있습니다.

현실은 오래 묵은 기억들과의 싸움입니다. 다툼 구조로 일관된 현재의 체제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얼마나 일관된 체제 안에서 길들여지고 습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각을 멈추게 하는 것은 공간적 배려들이 남긴 넒은 의문의 몰아 과정들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내 몸 안의 생체 시계가 힘들어하고 느릿느릿 태엽을 풀어 갈 때에야 비로서 시간으로 채워진 것들을 이해하다니 말입니다. 곧 그 것이 이승과의 작별의 시간이 점점 줄어듦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시간의 비밀은 여기서 다시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는, 현재 우리들 곁에 서식하고 있는 곤충류들이 겪어야 하는 변태적 양상을 띄게 됩니다.
비밀은 삶을 두렵게 하거나, 존재의 의문의 문을 열게 해주는 통로임을 알게 되는데, 비밀의 속성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감춰져 있는 게, 혹은 숨겨져 있는 게 태반인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일 백년 만 지나가도 역사는 실사에 굴절이 보태져 어느 게 실사인지 어느 게 허사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과거에 대한 인식은 시간의 무게에 따라 공간의 억측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공간적 배경에 따라서 시간의 의미가 다르게 변하고 맙니다.
싫든 좋든 간에 내 안의 태엽이 원 위치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과거들이 초대하는 현재적 삶을 일탈케 하는 중요한 열쇠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미지의 시간을 굳이 미래라고 여기지 않는 것은 금언처럼 달라붙어 다니는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불만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시간이 멈춘다고 해서 이타의 시간까지 멈추는 것은 아니니까요.

점점 많은 사람들이 엮어 내는 신화 창조의 순간들을 접하면서 혹시 몰아를 향하는 자아가 이용이나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시간에 묻습니다. 공간은 평안하신가 하구요.

올림픽에 몇 날 며칠을 밤 세워 가며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금빛으로 남아 있는, 소위 불굴의 정신으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했다고 전해지는 사람들과
몇 달 째 공전하는 선량들, 노벨의 이름을 들먹이며 한반도의 평화가 인류사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잣대가 자신들에게 얼마만큼의 부를 줄 것인지를 셈하는 사람들, 분단으로 인하여 비롯된 제반 상황들에 대해 작가 정신을 들이댔던 펜촉이라는 무기가 새 천년이라는 과거의 시점에서 갈팡질팡하는 노령화된 육신을 더 이상 지탱케 하지 못할 정도로 늙어 버렸다는 것 등등

신화는 여전히 아름다워야 하고, 신은 여전히 나름의 포석을 두며 세상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밤의 대화 회원들을 사랑하는 법은 더, 뭐 좀, 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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