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우리들의 넷. 바람(願)의 흔적

濟 雲 堂 2000. 9. 26. 12:21
하나, 둘, 셋, 다섯, 여섯, 일곱...
우연한 셈을 하다가 빠뜨린 숫자에 대해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넷은 네 번째인 순서를 말하여지는가, 아니면 숫자 4를 말하여지는가
아니면 한자의 죽을 死자를 말함인가? 혹은 불운의 숫자를 통칭하는 불쾌지수를 말함인가?
우연한 셈은 다섯으로 넘어가는 데에, 어쩌면 통찰의 힘을 빌지 않아도 쉽게 이어지는 관습의 율령에 지배받고 넷은 마음속에 부재해도 좋은 존재로 무시당한다.
우리의 삶을 유심히 보면 넷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냥 건너뛰어도 되는 것 혹은,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도 마음에 전혀 상처를 주지 않아 부담이 적을 뿐더러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쉽게 생각되어지는 우리 삶의 징검다리.
셋은 고단위의 숫자로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하여 빠뜨린 넷을 마음속으로 무시한 채 다섯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너지의 출중함 때문에 우리 삶의 빈자리일 수도 있는 하찮은 넷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판정 내릴 따름일 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넷의 위치에 있던 존재들을 유심히 보면, 거개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게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았음이 감지되고 있다. 건너 뛰어온 역사의 넷 속에는 불행함을 자초한 것도 있고 하마터면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문제를 당하고 있었던 것도, 더 낳은 조건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사실들이 교훈처럼 넷이라는 위치에서 역사를 말하고 있다. 건너뛰어서는 안될 것이었다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시간의 점철 속에서 얼마나 많은 넷을 지나쳐 버렸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문학에서, 소위 오늘날의 정치를 구현하는 사람들에게서, 근본적인 문제의 중심을 회피하는 자신에게서, 우리는 아직도 터부시하듯 넷의 구조를 부정이다 라고 만 하였다.
넷은 신분 상승을 위한 발판의 구실을 하지만 진화의 돌연변이 구실을 언젠가는 담당하고야 마는 수리성을 갖고 있다. 수리성이 보여주는 체계는 부실하면 무너지고 무너짐의 극대점은 불명예, 고독에 이르는 병, 죽음 등으로 드러나는데, 피라밋 구조 같은 수리적 안정성을 택하지 않은 것들은 언젠가는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삼풍이나 와우, 또는 인현동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러한 차원의 넷은 넷의 범주에서 지극히 미진한 것들의 일부일 뿐이다. 넷의 전체는 무시됨이거나 무관심의 영역 전체 혹은 무지의 관대함들이 빚은 모든 것들이 될 수 있다.

넷을 적확히 진단하고 다독여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맺힌 것을 풀어주고 느슨해 진 것을 단단히 조여주는 상서로운 마음의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질 때에 총체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열리는 것이다.
넷은 풍요롭거나 과소한 것이 우리들 삶에 큰 비중으로 차지 할 때 현재적 삶을 아주 가까이서 위협을 한다. 먹을 것이 적어서 고통받기 보담은 먹을 게 많아서 고통받는 일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 풍부한 잉여는 이를 해소할 목적의 방편들을 새롭게 만들어 대고, 산업을 다양화시키고 변화, 발전된 형태로 초대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말하여지는 무수한 방책으로, 또 다른 넷을 빼놓은 채 범위를 넓혀가고 게다가 속도라는 날개마저 단 상태에서 운명의 밖까지 치솟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속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를 넓히면 넓힐 수록에 미궁은 더 깊어질 뿐이다.
이러한 나의 넷에 대한 강박이 확대되는 것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다. 작아졌으면 좋겠다. 우연한 셈이길 바란다.

이 지구를 절대 수의 개념으로 풀어놓은 피타고라스를 씹새꺄! 라고 하면 회원 님들은 나를 욕할 것인가? 아니면 짐승적인 삶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전대 미문의 성현들에게 좃 같은 자식들! 이라고 말하면, 또는 소극적 의미로 우리나라의 총체적 행태를 비정형적으로 가꾸어 오신 개 같은 님들! 께. 그렇다고 그러한 넷 속에서 하나도 없는 내세울 것 없거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잘 나 보이려고나 하는 짓이 아님을 알면서도 주어진 이 우연에 필연처럼 나는 넷 중의 하나요! 라고 말하는 작태를,
회원 님들은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글쓰기를 그만 두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대가 나쁜 피의 수혈을 받았는지 광적인 것이 차마, 쓰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요행인지 불행인지 그 시대에는 수많은 시인 가객들이 흘러 넘쳤었구요. 현재 그들은 그 무엇의 또 다른 형태소로 진화하여 저처럼 허튼 소리만 해 대구 있을지도 모르겠구요.

여기가 밤의 대화임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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