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보름만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오곡밥과 관련되어서도 아니고 귀 밝기 술이라든가, 부럼을 못 먹어서도 아니다. 가족과 관련된 사연은 더더욱 아니다. 다름 아닌 지신밟기 행사 때문이다.
1990년부터 2007년까지, 17년 간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주최로 매년 행사를 치러냈던 기억과 그 잔영들이 무시로 떠올라서이다. 전통문화의 대중적 예술표현이란 거창한 주제로 놓고 보면, 놀 것도 보거나 즐길 것도 별로 없던 인천 지역사회에 처음으로 선을 보였던 게 ‘황금가지’의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행사였다. 느슨해진 군부정권과 예정된 문민정부의 틈바구니에서 전통문화의 재현과 침체된 지역경제, 땅바닥까지 떨어진 상인들의 심기를 조금이나마 북돋아보자는 취지에서 단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하게 된 거였다.
제자들을 끌어 모아 처음 시연했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초보 수준이던 대건고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유치원 인천교사 모임인 유인교, 인천제철 노조 풍물패, 장애우 모임인 엠마우스 등을 큰 축으로 삼아 길놀이, 고사, 지신밟기, 달집태우기 등으로 행사를 진행했었다. 복전(福田)이라 이름붙인 돈 통에 걸립(乞粒)된 일체를 연수동 장애우 시설에 보탬으로서 전체 행사를 마무리한다는 뜻도 참가자들에겐 깊은 감동을 주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이야기다.
당시 연수동은 개발 붐을 타 아파트 내지는 상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돈 꽤나 굴렸던 원도심 사람들 거개가 연수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가운데, 그로 인해 산중턱으로 밀려난 장애우 시설에 서슴지 않고 디밀던 복전은 무엇보다도 의미가 컸었다. 17년 간 그래왔었다. 불현듯 대표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후임자에게 내주었고, 그것이 터진개(신포동의 옛 지명) 지신밝기의 종지부가 되고 만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여하 간, 지금은 이와 비슷한 행사들이 동네방네에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다른 형태의 소규모로 여전히 치러지는 모습에서 그나마 일조했음을 위안으로 삼게 되었다.
대도시 인천에서, 더군다나 도시공동화의 핵이었던 원도심에서 전통 놀이를 시연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어찌 보면, 양복이 몸에 밴 사람에게 저고리를 입혀놓고 억지춘향 노릇을 시키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지신밟기 전체의 맥락을 유지하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내용의 다변화를 꾀했던 노력들이 서서히 지역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도시 불균형과 기형적 성장의 그늘을 일궈가는 데에, 일개 시민 단체의 힘으로 미미하나마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점은 긍정의 일면이었다. 적잖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단단해진 것은 맷집이었고 고향에 대한 오기서린 애정이 가슴을 채우는 일이었다. 기어이 만성적 경기침체와 급변하는 경제구조개편의 큰 물살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그 맥락을 잇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연약한 재정구조를 극복할 재간이 없었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신자유주의로 무장된 시대 요구와 자본주의의 황금잣대로 비롯된 가치 기준의 변화가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재편이 강력히 요구되었던 게 주된 요인으로 보고 있다.
올해도 정월대보름 저녁은 뒤숭숭하게 지나갔다. 보름 전 날, 동공에 새겨 넣던 미완의 보름달이 전부였고, 일기예보에 따라 가녀린 눈을 맞으며 집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느지막한 밤이었다. 배다리 관통도로 유휴지에서는 소원지를 달집에 묶어 달집태우기를 한다 했고, 늦게라도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누군가가 전화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나감에 따라, 고천문을 작성해 한 해를 기원하고 묵은해에 이루지 못했던 바를, 해학을 곁들여 익살스럽게 읽어내려 소지(燒紙)했던 일들에 추억이란 첨언을 또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지신밟기 행사를 재개할 기회조차 마음에 견주지 못하고 어언 십년이란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지역적인 것의 세계화를 주창했던 첫 마음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간 회한이 드는 세월이 아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 자발적 추렴과 미숙하지만 시민 대중들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려 했던 노력들은 철지난 좌표가 되고 말았다.
스마트한 세상에 묵힌 아날로그적 심성을 다시 꺼내들어, 이지러져 가는 달빛 아래 다시 들척거려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마저 지역사회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가슴팍을 내리 꽂는다. 공공기관 주최로 윷놀이 달집태우기 등등 전통놀이를 연면하고 있지만, 지역 또는 동네 특성에 맞게 주민이 주관해서 대동하는 놀 거리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과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통놀이를 왜 해야 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음할 기회조차 오프라인 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기꺼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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