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칼럼인 만큼 덕담 한 됫박 수북이 담아달라고, 논설실장 김진국 박사가 모종의 압력을 가해왔다. 일상적이고 평이한 말투였지만 귓밥을 잡아당기고 고막을 두드려가며 달팽이관에 도착하는 동안, 그 주문은 엉뚱하게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이곳저곳을 찌르고 다녔다. 인천사랑을 빙자해 ‘인천한담’을 쓰는 내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인천의 의제를 담아보자는 순수한 의도를 넘어, 애꿎게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아닌지.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었는지. 자기만족에 빠져 공염불만 왼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김 박사가 필자에게 던진 병신년 덕담송(德談訟)은, 명확히 말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반성문 작성 요구였고 안과 밖은 물론, 올해도 총체적으로 정신머리를 놓아서는 안 된다는 일깨움으로 들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귀청은 먹먹하고 심쿵했지만, 되레 안구가 맑아지는 기현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지지난 주 칼럼 끝자락에 ‘병신년 원숭이해’라 써 놓고 한참을 키득거린 적이 있다. 불경스런 욕설처럼 들렸을 런지 모르지만, 태연하게 꿍치고 있던 금기어를 지면에 노출시켰다는 묘한 쾌감을 일면 느끼기도 했었다. 액면 그대로 얘기 했다간 큰 곤욕은 물론 반인륜적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문장의 모호함에 편승한 탓에 절묘하게 빗겨가 마음 놓고 웃음을 풀어놓았던 것이다. 쓰다 보니 우연하게 실소의 옆구리를 건드리게 된 거지만, 가벼운 풍자가 붓 끝을 세운 촌철살인의 선언문만큼 사실적이고 제대로 감동을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전통 탈놀이가 당대 상황을 빗대 민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었던 만큼, 삶의 의미를 되찾는 역할이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군사정권 당시, 풍자와 해악을 곁들인 작품들을 통해 평화적으로 대응했던 작가들의 높은 문화수준은 혼돈스러운 이즈음에도 변함없는 사표가 되고 있다.
여전히 진행형인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 한일 위안부 문제, 편법적인 배다리 산업도로와 일련의 도시재생사업, 인천가치재창조 관련사업, 인천성모병원 사태 등의 의제들이 팥알처럼 산재해 있는 상황에서, 병신년으로 바뀐다 해서 쉽사리 싹을 틔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 치 눈 밖의 일상에조차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소시민들의 지난한 삶에 견주어, 다가올 새해 역시 셈판을 두드리는 위정자들의 ‘그들만의 리그’에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쨌든, 병신년도 ‘세상의 균형’을 잡으려 무던히 애써야할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균형을 찾기 위해 갈등해야만 했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지혜롭고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간곡히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랄까. 필자의 주제는 글쟁이다. 진즉에 인천의 큰 어른 한 분이 ‘떡 빚는 글쟁이’라 했거늘, 졸작 한 편 첨하여 독자들께도 더불어 인사를 올리나니 ‘새해 소금 많이 받으시라. 정녕, 꼭 받으시라.’
조선 전기 전순의가 집필한
산가요록에 기록된 대로
떡을 만들어 본다.
송진가루 찹쌀가루 반에
꿀물을 섞고, 잣을 소로 넣어
불화로 같은 지짐판에 송고병(松膏餠)을 지져라
더덕 껍질을 벗겨
쇠심줄 찢듯, 꿀에 절였다가 쌀가루로 싸서
내 아버지 떡 찌듯 시루에 얹힌 게 산삼병(山蔘餠)이니,
세종의 어의,
세조의 총애로 기록된 산가요록에 따라
조선의 떡을 만들어 보았다.
후질 것 없는 21세기,
터진개 떡방에 앉아 이전 세상을 맛보니
투박스런 현미 가래떡보다도 맛이 없었다.
그 어디에도
소금을 쳐 먹으라는 기록은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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