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寫中之米+羔 사중지고

濟 雲 堂 2016. 2. 10. 15:21


전체의 주제는 미소였다. 입을 벌리지 않은 채 빙긋 웃는 모습이지만,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이해심의 발목을 잡는 그 무언가가 올가미처럼 걸쳐져 있었다. 정지돼 있는 피사체 이전과 그 이후를 짐작할 수 있는 형질의 부재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호사스러움 한 조각쯤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누군가의 누리집에 올린 떡 파는 장면이었다. 필자의 생김새와 똑 닮은 사람이 떡국 떡 한 뭉치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체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이 장면은 어찌 보면 ‘빛 좋은 개살구’처럼 좋은 그림으로만 연상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은 인류가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 놓은 무언의 소산이었다. 소통과 화합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비웃음으로 인식돼 불통하게 만드는 치명적 감정 유발행위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웃음의 백태 가운데 미소는 백 마디 말을 한 단어로 함축시키는 시어처럼, 단아하고 상황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행태로 변신하기도 했다. 위의 정지된 장면은 되감기 하듯 풀어보거나 삼배 속도로 연속해 보면, 미소는 역설이 되고 떡은 지속적인 미래를 담보해주는 아이콘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에 담긴 한 봉의 떡은 완성품이라기보다는 완성으로 향하는 미완의 기다림이었다. 멀쩡한 멥쌀을 열 시간 가까이 불리는 동안, 적어도 냉수마찰은 열 번 가까이 해야 했고 피눈물 같은 뜨물을 헤아릴 수 없이 지하세계로 흘려보내야 했다. 분열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만질만질한 쇠뭉치 롤러로 무장된 입 큰 분쇄기에 온 몸이 파쇄되는 것도 모자라 째진 몸에 소금까지 뿌려대는 지독스러움을 맛보기도 하였다. 점도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는지 얼음물세례를 한 차례 더 받아 주물러 터질 정도로 반죽 마사지를 받고나면 한 번 더 쇳덩이 속에서 잘근잘근 부서지는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쌀의 형체는 원형질 그 자체로서 원소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제 자신을 완전히 포기 했을 때, 그 상황마저 내버려두지 않는 잔혹함은 펄펄 끓어 펴오르는 수증기 속에 퍼 담기는 것으로 이어졌다. 고통도 인식도 없을 것 같은 네모진 시루에서는 김새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다. ‘찰지군!’이란 한마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냅다 쌔려 놓는 제병기 널 위에는, 분열을 멈춘 쌀의 화신들이 한 덩이로 네모지게 엎드려 있었다.


두 갈래 줄기로 나뉘어 나오던 긴 떡들이 못 견디게 뜨거웠을 여정을 달래듯 찬물에 퐁당퐁당 미끄러지듯 입수하고 있다. 느낌도 인지도 불가능해 보이는 긴 몸뚱이를 정렬해 판때기에 몸을 눕히는 동안, 안도의 한숨처럼 김들이 폭폭 펴올랐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말한 서 모 시인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제부터 삼일 낮밤을 시간에 맡겨야 했다. 냉습함과 찬바람과 가끔씩 손마디 갈라져 터진 작자(作者)가 어루만져주는 거친 손길만이 필요했을 뿐, ‘주검의 삼일’처럼 꼿꼿하게 상자곽 속에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자의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해도 ‘나’를 처참히 사용한 응당의 대가이기에 침묵이 오히려 서로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전처럼 잘려나간 떡들이 차례 상에 올려졌다. 제 몸을 완전히 사르고 부서져 지옥 같은 불길을 견뎌낸 부활의 증표들이 떡국이 되었던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불러 모으는 설. 앞으로도 죽어야할 사람들을 위해 산 사람들이, 앞서 간 어른들 앞에 처연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 동시적으로 교차하는 위대한 순간에, 웃음을 머금고 떡국을 들고 있는 우리의 설이 세계적이고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유산인 이유는, 떡국으로 하나가 되고 가래떡처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은연히 가르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요맘때 치르는 브라질 삼바 축제가 동적인 화려함을 가졌다면, 설은 정적이고 소박하면서도 국민 전체를 떡국 한 그릇으로 일체화시킨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정지된 장면을 다시금 살펴본다. 미완의 기다림 이전과 그 이후가 명확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진의 주제인 미소와 그 속에 밴 이면의 세계를, 전체 그림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찾는다. 젯밥에 마음 둔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기에 여지가 남지만, 떡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고통의 장막을 통과하지 않고 낳은 아기는 없다. 아울러 죽음의 문턱을 넘지 않는 생명체가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삶과 죽음, 시작과 마지막을 전국적이며 통시적으로 밥상에 차려지는 떡국을 그려보면서, 정지된 사진 속의 미소를 넌지시 따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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