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겨울, 그 깊은 봄

濟 雲 堂 2016. 1. 28. 17:30


늙은 아파트 주차장에 질서 정연하게 주차돼 있던 차들은, 언제 새끼를 치고 또 쳤는지 바깥 도로까지 두세 겹의 민머리를 맞세우고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무심했을 모습들이 오늘따라 유독 불편해 보였다. 억지로 시동을 걸어 예열을 마친 스쿠터를 끌고 겨우 정지선에 섰다가, 출발신호와 동시에 시동이 꺼져버리는 혹한의 새벽이어서 그랬을까. 마스크 목도리 헬멧을 뒤집어 쓴 채 바라본 동녘 하늘은 까마귀 빛이었다. 바람에도 칼이 숨어 있다는 말은 적절했다. 성에 잔뜩 낀 눈썹 끝에서 여명은 어둠을 밀어 올려보지만, 별들의 시간이 조금은 더 극성스러운 듯했다. 벌겋게 얼어붙은 이마를 녹이며 들었던 생각은, 겨울이 겨울다운 것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며칠 남지 않은 입춘 소식도 생경하고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내면, 정녕 봄이 오는 것일까 하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겨울, 그 깊은 속내가 봄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가질 수 없었다. 오우천월(吳牛喘月)이란 말처럼 더운 오나라의 소가 추위를 싫어한 탓에 달만 보아도 숨을 헐떡인다 하듯, 요 며칠은 현수막 얄팍한 껍질만 흔들려도 뼛속까지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기형적인 날씨의 정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하늘을 찔러댔다. “막내 하지(할아버지) 눈이 대문을 막아버렸어요.” 라고 워싱턴 디시 인근에 사는 큰 형님의 손주가 안부를 묻는 내게 말했다. 애들도 건사해야 하지만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며 조카 내외는 진작부터 팔을 걷어붙였고, 마치 평생 치울 눈을 쓸어낸 것 같다고 전했다. 건기이자 겨울이어야 할 태국에서도 “영상 35도를 웃돌고 연일 무쟈게 비가 쏟아진다.”며 친구는 대변혁의 조짐을 삼십년 만에 조심스럽게 진단하기도 하였다.


날씨에 대한 불신은 세상살이에 대한 신념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가 진즉에 나왔었다. 인간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가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은 차라리 낭보였다. 인과관계가 명확하고 해결해야할 방향성과 목적까지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에 대한 신념의 약화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 층 겨드랑이 속으로 찬바람 스며들 듯해, 자칫 절망감을 떠안길까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당장에 누리과정 보육 예산지원 시스템의 절룩거림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부모와 교육관계자들의 혼란야기는, 미래의 씨앗들에게 불안감을 조성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옥토를 조성해 미래자원을 키우자던 공약들을 내팽개치고 황폐한 자갈밭으로 내모는 인천사회 정치권의 불량한 심사는 두고두고 눈여겨볼 일이다. 이는 국가와 지자체를 포괄해 모든 위정자들의 존재론적 함량미달로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딱지 한 뭉치를 손에 쥐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동공을 맥시멈으로 확장한 채 악수를 청하는, 지상의 구태가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있다. 평상시 굽혀본 적도 없는 허리를 연신 숙여보지만 머쓱하기는 악수를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생로병사 네 자만큼이나 쓸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의 일생이건만, 언제 그리도 많은 이력을 쌓았는지 휘황찬란한 계급장이 모자라 금배지 하나 더 취하려는 모습은 흡사 개와 같았다. 주었던 먹이를 도로 빼앗으려 했다가 손가락을 물려본 경험이 있는 견주들은 절대로 개 먹이에 손대지 않는다. 그래서 홍시 같은 얼굴을 디밀어 발그레 미소를 띤 악수를 청해도 생각 많은 유권자들은 쉽사리 웃음으로 답하지 않는 이유이다. 민주주의, 구체적으로 선택적 대리정치라는 우아한 포장은 ‘종합선물세트’처럼 과자부스러기 몇 개에 불과한 허접함에 더 많은 비용이 첨부된 과잉이라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속의 달콤함을 오래 기억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와 개주인은 ‘개’자 만을 공유할 뿐, ‘주객’이 뒤집어졌다 엎어지고 쓰러져도 냉랭하게 응시하는 다만, 사회적 사슬관계이기 때문이다.

4월 13일이 정확히 이 땅에 안착할지 모르겠다. 풋내 나는 입김 솔솔 몰아쉬며 꽁꽁 얼어붙은 동토를 달리는 스쿠터가 이 모양인데, 그 날 봄은 과연 봄으로서의 봄일지 기약 없는 가운데, 마음의 질병 하나를 또 낳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은 깊고 냉습하다. 절대 시간 앞에 녹음의 추억과 사과 향기 잔뜩 밴 종이상자에 누워 오수를 즐기는 따위는 꿈꿀 수도 없을 정도다. 영하 18도가 이 겨울의 마지막 꼭짓점이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봄, 그 좁은 길을 향해 머리를 좀 더 낮춰야 하고 옷매무새를 저며야 하며, 빙상(氷傷)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더 천천히 달리는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다. 이중 삼중 길 한 가운데를 틀어막은 채 주차돼 있는 내 이웃의 애마들에게 차마 ‘불법’이라 명명치 못하는 비겁함이 별처럼 반짝이는 새벽녘. 아침은 멀리 있었다. 깊고도 먼 거기, 봄 나부랭이 하나쯤 찾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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