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9년 늦은 겨울, 새벽.
한 통의 전화가 다급히 걸려왔다
직감이었을까?
불길한 느낌 그리고 불안감...
뭔가 안 좋은 소식일 거라는 막연함이 불현듯 스쳤다.
제자 몇 놈이 묶음으로 능내에 놀러간다고 찾아왔다
날씨가 너무 좋아, 겨울 날씨 치고 영상의 날씨를 웃돌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결정한 곳이 능내라 했다.
능내.
일찍이 나도 몇 번 가본 곳
대학 다닐 때, 좀 더 커서...
그리고 좀 더더 커서 가본 곳.
한번은 모꼬지였고
또 한번은 철부지 계집애와 함께였고
세번 째는 다산의 흔적을 찾아서 가본 곳이었다.
선생님...
아니, 사부님...
명칭이야 어떻든 간에
말 끝을 흐리며 귓 볼에 집어 넣던 몇 단어는
헌식이와 동현이라는 이름이었다.
지금, 그 또래들은 시집 장가를 가서
아이 낳고, 어떤 놈들은 유치원 부형이 되어
잘 살고 있건만
사어(死語)가 된 두 놈의 이름은
내 기억 속 여전한
18살 까까머리인 채로 남아 있다.
2.
2013년 9월 27일 새벽 2시 39분
점잖지만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역시 직감이었을까?
12시까지 원고를 살펴보고
내일 새벽 일을 하기 위해
배갯머리에 누었건만
"아빠, 아들 밤 늦게 자전거 타는 거 위험한데..."라는
엄마의 말이 천정에 하얗게 맴돌고 있었다
ㅇ병원 응급실
아들은 피범벅이 된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 깨지고, 콧속 피는 딱딱하게 굳어 있고
정강이 부근은 숟가락으로 파낸 듯 깊이 패여 있었다
외관 상으로는 큰 상처가 보이지 않아
엄마를 달랬다.
젊은 인턴과 레시던트 의사들이 피를 닦아내고 있는 와중에도
아들은 "죄송해요"라는 말만 연거푸 내뱉었다.
정신이 있는 걸로 보아 역시 안심
그러나 피를 닦아내는 의사들이 CT며 X-ray로 확인한 결과
쇄골, 팔꿈치, 얼굴 뼈만 나갔다고 했고
다른 데는 이상이 없다는 말을 전해 왔다.
'나갔다'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어낸 말이었고
정확히는 골절이었다.
같은 날 새벽 4시 20분 께
큰 딸의 나이 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 것에 실려왔다
역시 자전거는 경찰차에 실려 있었고
119 구급차는 분주한, 그러나 잰 몸짓으로
응급실로 환자를 밀어 넣었다.
아들은 2미터 난간에서
그 여자 아이는 8미터 난간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그 것도 자전거를 타고
시간도 얼추 비슷한 시점에서
아들은 12주 진단을 받았고
29살 짜리 김ㅇㅇ양은 다음 날 조간 신문에
사망 소식으로 전해졌다.
아비(어른, 사부, 선생) 된 입장에서
불운과 비애를 그리고 처절했을 정황을
떠 올려보니 너무도 가슴이 미어져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떠 올려지는 모든 기억들에게
그 것도 슬픈 기억들
모든 존재의 아픔에 대해
눈물 담은 기도를 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