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답동성당 小史

濟 雲 堂 2013. 5. 15. 22:00

 

답동성당은 인천 개항장 일대에서 유일한 국가 사적(187호)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1886년 프랑스와 정식 수교를 맺은 이후 1889년 답동 산 3번지에 자리를 잡고 임시 성당을 짓게 됨에 따라 전교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각국지계 혹은 외국인 공동지계 가운데 비교적 외곽이라 할 수 있는 답동 언덕에 교회를 짓게 된 이유는 오례당(吳禮堂)이라는 인물이 땅의 일부를 프랑스 전교회에 희사했기 때문이다. 오례당은 중국 강소성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유미유동(유학생)에 선발되어 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중심으로 서유럽의 문물을 일찌감치 견학한 재원이었는데,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 조선해관 최초의 해관장인 묄렌도르프의 추천과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인천 해관에서 근무한 인연을 갖게 돼 인천에 정착한 인물이었다.

 

답동성당 종탑에 있는 세 개의 종 가운데 가장 큰 종의 표면에는 그 종의 기증자인 오례당의 영문명인 ‘우리탕 Woolitang’이 양각으로 남겨져 있다. 답동성당은 1937년 과거의 고딕 양식의 건물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절충형)으로 새롭게 변모하게 되었다. 교회의 첨탑이 삼각형 직선의 모습에서 둥근 돔 형식을 빌어 둥글게 처리한 세 개의 첨탑과 벽돌로 장식한 외벽이 특징적이다.

 

설립 초기에 일본인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이었고 이후 해성보육원(1895)과 인천항 박문소학교(1901) 등의 설립에 따른 영향으로 한국인 신자가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이후 수녀원과 주교관, 별도의 성당사무실 겸 답동신협이 연이어 개설됨에 따라 더 큰 규모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와 별도로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는 일본의 치세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해 강점기 당시에 인천 지역사회에서 냉대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신사참배를 묵인하고 성당 내부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등의 행위는 당시의 반일 감정을 야기 시키는 구체적인 행태였다.

 

1960년대 후반 들어서 답동성당은 JOC(가톨릭노동청년)운동을 주도 하기도 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에는 민주화의 성역으로서 당대의 군사정권의 압제에 맞서 주도적으로 앞장 서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다. 2011년 현재 답동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절, 제물진(현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천주교 신자의 참수 자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성역화를 전개하고 있다. 아울러 공원을 조성할 계획하고 다방면으로 지역에 뿌리내린 역량을 모아 인천사회에 공헌하고자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2013년 2월 눈발 겨우 멈추던 오전 성당의 뒷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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