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념 표지석을 보면
발견의 설렘보다 참담했을 당대의 무력감이 먼저 떠 오른다
우선 개항의 주체는 일본이었다
당연히 일본식 석각기술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이고
아무렇게나 조탁의 손길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쪼고 다듬어내는 전체적인 각인 기술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더불어 그렇게 예사롭지 않게 우리가 선듯 이 땅을 내어준 데에 대한
역사의 사기극이 그저 미어지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개항기념이라는 문구를 써 놓은 걸 보면
개항 당시의 시점에서 이미 벗어난 시기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념이라는 수식어는 일주년 또는 어느 특정한 해를
기점으로 잡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러면, 이 표지석은 언제 만들어졌고 어떠한 용도에 의해서 만들어졌을까?
놓여진 위치며, 행여 그 위치가 변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하면
왜 옮겨 놨으며 이렇게 옮겨질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일언반구 없이
침묵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찍이 인천은 바다를 통한 무역의 거점지로서 역사에 기록돼 왔었다
백제가 국가적인 면목을 획득하기 시작했던 372년 무렵
현재 탈도 많고 말썽도 많았던 송도 신도시 가는 길목 나루에
능허대라는 포구를 개설하였다.
고구려가 중국으로 가는 무역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지책으로 만든 것인데, 당대의 항해 기술과 방법은 차치하더라도
독자적으로 항구를 만들었었다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이런 의미의 개항에는 독자적이라느니 주도적이라느니 하는
찬사를 받기 마련인데 인천의 능허대가 그런 무게감을 지녔다고 하겠다
헌데, 1500여년이 흐른 1883년. 인천의 개항을 두고 일본인들과 혹자들은
인천 지역 최초의 개항이라는 수식어를 남발하고 일본인이 주도한
인천의 개항 원년을 우리의 것인냥 곡해하고 있어 역사 인식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말았다.
개항기념 표지석은 현재 인천 여상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자리에 설치됐던 신사가 해방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지금
태신궁이니, 본전이니 하는 건물은 사라졌으되 신사를 꾸몄던 일체의
돌들은 여전히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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