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회식, 포럼을 마치고

濟 雲 堂 2000. 9. 3. 00:27

만사형통이라는 설렁탕 집에서 우리는,
서로의 인생 뒤안길에 슬며시 놓아야 할 빚을 감춘 채
일 인분씩의 밥그릇과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다

아직도 우리가 먹을 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순간,
마음 속 주억거림이 멈추기도 전에 소주가 한 순배 돌아가고
米壽의 汗翁이 후벼 파내던, 고름이 아직 덜 닦인 물수건에 배인다

누렇거나 잔득 때가 끼인 웃음을 훔치고
밥이 채 넘어가지 않는 목구멍으로 알싸한 취기가
만사형통이라는 설렁탕 집에 자욱하다.

똑똑한 먹물들이 하나 둘 먼저 일어나고
호주머니를 뒤져 툴툴 털어내던 손수건이 갑자기 커다란 가면이 되어
한 꺼풀씩의 낱말들을 벗겨내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여든 여덟 살의 바쁜 노인네를 모시고
마치 꼭, 치뤄내야 할 통과의례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취기의 목마름은 언제나 멈추게 될는지

어머니가 창 밖을 보며 말씨를 뿌리신다
얘! 해가 바다로 빠져드는구나!
참! 오래 묵은 말의 씨뿌림이었습니다

다시, 설렁탕 집 간판의 불은 켜지고요
비의 여신이 심통부리고 지나간 구월동 문예회관 앞길에서
오랜만에 보는 빛도 좋았던 어스름 저녁이었습니다.


*汗翁(한옹) 신태범 박사 님의 호
땀 흘리는 노인, 또는 빠쁜 사람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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