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

인천문화원

濟 雲 堂 2013. 7. 7. 00:21

인천문화를 말한다.

                    

충돌한다 고로 소통한다.

시인 이종복

문화를 한자로 써놓고 보면, 글월 문(文)자는 납득이 가는데 될 화(化)자는 어딘가 의아스러운 풀이에 부딪쳐버린다. 단어의 전체적인 모양새는 교육과 깨우침, 성장과 변화 등의 이미지가 담겨 있어, 언 듯 생각하면 50% 할인된 아이스크림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지만, 파자(破字)를 하면 나무 막대 하나 달랑 남은 듯 황당함이 엄습해 온다. 엄습의 후기는 물을 마시는 게 차라리 더 나았고, 파자를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말 것을 이었다.

 

여하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게 무지하게 어려웠던가 보다. 글을 가르쳐야 하는데 비수(匕)가 필요했던 걸 보면 말이다. 사람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한 번, 될 화(化)자를 써 보니 사람만큼 잔혹한 짐승이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했다. 하긴, 한 번 배우면 죽을 때까지 써 먹을 수 있다며 어린 새끼들 손모감지를 꼬집으며 젓가락질을 가르치던 마누라를 생각할 때, 방법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서 그녀의 혜안에 진작부터 고개를 끄덕거렸던 적이 있던 걸 보면.

 

인천에서 산지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늙수그레한 글쟁이가 회고담을 책상머리에 놓고, 뺑 둘러앉은 수강생들에게 옛날 얘기하는 밑그림이 떠오를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고 자란 시간을 포함해서 말하면 ‘애걔, 겨우’라고 비아냥거릴 사람들이 290만 인구 가운데 35%가 넘는다. 그런데, 인천광역시 또는 중구, 그 가운데서도 신포동 한 곳에서만 ‘반세기’ 이상을 살았다고 했을 땐, 얘기가 달라져 버린다. 상위 5%가 된다. 옛날로 치면 ‘진골’에 ‘성골’ 쯤이 된다. 그러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방원 -하여가-)” 또는 “지방잡대학(地方雜大學 2013년 6월 17일자 인천일보 기사)” 출신 정도로 폄훼되는 상황에서 나고 자란 인천사람들이 여전히 별 볼일 없이 취급되는 시절이 되고 말았다. 아울러 이런 얘기는 한 곳에서 얼마나 살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인천에 유입된 사람들의 뇌수에 담금질할 필요조차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한 곳에서 살았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지방문화의 본질과 그 아우라(Aura)는 지역적 성장과 깨우침을 숙제로 짊어진 사람들이 엮어낼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교육과 변화라는 질료를 태워야 성장할 수 있고 목표인 고도의 삶의 질에 도달하는 ‘장소성’과 ‘정체성’이 곧 인천사람 또는 인천문화를 만든다는 신념이 곧 지역문화를 살아 있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근대 개항 이후 인천의 품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짬뽕’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관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잡종, 하이브리드(Hybrid), 섞음, 융합, 멀티(Multi) 등 이음동의로 불리는 많은 단어 가운데, 가장 인천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식 짬뽕의 발상지라는 점에서도 ‘짬뽕’은 꽤나 근사치에 가까운 개념이다. 경망스럽게 일본 나가사키를 원산으로 삼고 있는 일본식 짬뽕을 빗대었다고 질타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도 짬뽕의 어원을 정확히 해석하는 사람이 전무할뿐더러 일본에 짬뽕의 원형인 초마면(炒碼麵)을 전한 중국 복건성 사람들도 초마면이 왜 짬뽕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는 판이고 보면 정의의 선점 차원에서 인천의 정체성을 짬뽕이라 불러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가려운데 긁어주는 효자손처럼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중국면의 한 종류, 섞어먹는 술, 이것저것 섞어 놓은 것이라는 풀이는 그나마 위로가 된다. 풀이야 어떻든 간에 뭐니 뭐니 해도 인천의 실존은 짬뽕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짬뽕도 짬뽕 나름이고 짬뽕이 되는 데에도 법칙은 존재한다. 아무거나 섞었다고 짬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맛도 있어야 하고 보기도 좋아야 하고 적당한 조합에 의한 섞임과 지속적 영양 공급의 현실적 완성도가 비로소 갖춰져야 짬뽕으로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짬뽕에는 다 그런 이유가 배여 있다. MSG로 맛을 내었던, 해물과 소채류를 잔뜩 넣었던 지간에 나름의 조합이 지속적으로 배려된 완성품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완성품은 절대적이지 않다. 상대적이고 변화의 여지가 늘 존재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짬뽕이라 할지라도 굴짬뽕, 오징어짬뽕, 홍합짬뽕 등 기존의 패러다임에 주재료의 첨가 방식과 양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부를 수 있기에 이와 같은 발상을 상호 인정해주는 포괄적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요약하면, 짬뽕의 정신은 완전하지만 불완전하고, 불완전하지만 늘 완전함을 지향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문화는 갈등으로부터 출발해 완성도를 높여가는, 끊임없는 과정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갈등은 잔잔한 수표에 지문을 남기는 돌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고 구조적으로 돌과 물과 운동에너지 전체를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모든 정체성은 충돌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내재돼 있는 잠재적 운동성이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천 사람과 인천문화는 이러한 개념과 정체성이 적극적으로 포함돼 있다. 생각해보라. 개항이란 생명부지의 얼굴을 보고 생경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금발의 서양인, 변발한 청국인, 존마게 머리를 한 일본인 등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삶의 방식이 다르고 말씨와 행태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잖은 갈등이 근대개항 이후부터 인천에 상존해 있었던 것이다. 그 충돌의 현장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인천만의 지역적 특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일본조계지, 청국조계지, 각국조계지, 조선지계의 설정은 어촌 마을에 변화를 불러와 격변하는 세기적 갈등을 직접 체험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각국의 종교, 교육, 문화, 경제, 정치적 행태들과 박래품 등의 출현은 전국을 통틀어 근대문화의 배내도시로 변하게 만들었다. 문화는 법의 성질을 따른다. 법(法)이란 물(水)이 흘러가는 것(去)처럼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상위의 개념이 하위 개념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 열강에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었고 첨예의 현장이었던 인천이 외래문화의 집산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천은 충돌의 도시이다. 충돌은 역사의 변증법적 프리즘을 거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조망되는 현상을 말한다. 존폐와 부침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현장에서 충돌현상은 대나무처럼 굴곡지고 마디지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충돌의 원형질은 존재 그 자체이다. 분화되거나 덩지를 불리거나 하물며 사라진다 해도 결국 존재감으로 남게 된다. 존재의 목적은 소통이다. 다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좀 더 진화된 형태로서의 짬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인천이 그렇다. 인천 사람이 그렇고 인천의 문화가 그렇게 만들어 졌다. 인천이 과연 저급한 도시인가. 지방의 잡스러움인가. 그러므로 인천은 늘 충돌하는 도시이다. 고로 미래와 소통하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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