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공간탐사 <작가들>
신포동. 雜, Chaos 그리고
여명기 기억 조각 하나.
생전에 시인 김수영은 “나는 지금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백여년 전에「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펴낸 비숍 여사와 사랑하고 싶다 했다. 그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속에서도 “낡고 한적”하기 이를 데 없이 초라하게 ‘인천’을 묘사했던 그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고 단호히 말했었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과 버드 비숍여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편지는 물론, 전화 한 통화도 해보지 못했으며 은밀한 입맞춤 또한 가져보지도 못했던 게 사실이다. 설사 그런 사건이 있었다 한들 짱짱했을 1960년대의 천재적인 젊은 가객과 둥그런 아이리시 통치마에 주름도 짜글짜글하게 피었을 1890년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물리적인 사랑을 나누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에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천재적인 영감(이런 말이 함부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의 소유자였던 시인의 시대를 넘나드는 인류애적 편린은, 어두운 지상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희망의 햇살을 던져주려고 했던 프로메테우스의 모반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불행했던 개인적 삶과 근대 시대의 현실적 아픔을 정화시키려했던 비숍여사의 기억들을 동병상련의 처지로 여겨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연갈색이든 초록색이든 간에 제국주의적 삶을 누려 왔던 수정체를 통해서 투영되는 근대의 프리즘은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파스텔 같은 색조로, 1894년 2월 개항지 제물포의 어느 이름도 엉성한 바닷가 마을을 한적하게 조망하고 있었다.
여명기 기억 조각 둘.
신포동은 이렇게 태어났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운명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기술돼 있는 것처럼 서구 유럽 사회에 알려지게 된 제물포의 모습은 아마도 토우(土偶)로 빚어낸 황토 빛 미니어처처럼 모든 게 조막스러운 장난감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1882년에 벌어진 임오군란과 1894년에 일대의 정신문화사적 변혁기를 홍역처럼 치렀던 동학혁명, 그리고 1895년 청일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이 좋아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부산과 원산의 개항을 통해서 개항장에 관련된 일자리 즉,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낭보는 먹고 사는 것조차 어려웠던 전국의 민중들에게는 복음처럼 간절한 소식이었다. 이러한 바람들이 급기야 인천으로 흘러들어 막막하기만 했던 숨통을 튀게 만드는 삶을 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한반도 중부권역에 살고 있던 민중들의 이집현상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의 그 것과 같은 것이었고 출애급시대의 엑서더스와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과적인 이야기겠지만 신천지를 향해 속속들이 모여 살게 된 비련의 주인공들이 딱히 몸 붙이고 살만한 집들이란 게 서양인들의 시각에는 허름한 움막 같은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물포 개항장을 이미 조각조각 나눠 먹기식으로(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상태지만) 땅을 나눈 열강들은 지계라는 이름으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을 시기였다. 일본지계, 청국지계, 서양 나라들을 통틀어서 각국지계 형식으로 말이다. 특히 각국조계지 거류민들의 협의체인 ‘신동공사’는 조계지 또는 치외법권지에서의 자치규약을 임의로 만들었는데 이를 토대로 건물의 외형과 치안 등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추진했던 시기였다. 건물을 지을 때, 벽돌과 화강석 등의 사용을 필수로 하는 규약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국에서 밀려들어와 신천지의 꿈을 그리며 실낱같은 희망의 뿌리를 내렸던 바닷가 사람들과의 그 것과는 천지차이였음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비숍여사는 인천을 보았던 것이다. 풀과 짚으로 엮은 몇 채의 집들과 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았을 마당 한 귀퉁이에는 젖은 그물들이 헝클어진 채 몸을 말리고, 지금의 답동과 신포동을 둘러싸듯 인접해 있는 해안은 따라서 청일 전쟁 당시에 죽은 일본군의 하얀 묘비들이 을씨년스럽게 도열해 있던 그 곳을 보았던 것이다.
여명기 기억의 조각 셋.
시인 김수영은 자유로운 여행가이자 집필가이며 지리학자였던 할머니의 열정적이면서도 기이한 행보에 묻어있는 제물포의 “낡고 한적한” 편린들을 진정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면 만 삼 년이 넘도록 한반도 일대를 떠돌며 여행을 다녔던 점을 높이 산 것일까? 아니면 여성성을 옭아매던 당시의 부조리함을 극복해가며 당당하게 시대를 헤쳐 나갔던 비숍여사를 통해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지난한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고 싶어서였던 것은 아닐까?
늘 새롭게 박제되어 가는 구도심에서
이제 신포동은 동네어귀에 들어서기만 하면 속절없는 역사의 장면들을 허접스럽게 모아둔 허술한 박물관처럼, 대거리 안주 하나만 던져주면 꿍쳐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냅다 길거리로 쏟아지는 구도심으로 변해버렸다. 번화했던 거리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길 한 구석에는 숨듯이 자리 잡은 붉은 벽돌 건물들과 돌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 드러누운 채 닳아빠진 화강암 조각에도 역사의 한 말씀들이 깊은 호흡을 가다듬는 곳이 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포동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벼보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머리터럭이 빠져나가는 물리적 나이를 절감하는 이 시점에서 여전히 생경스럽게 다가와 뒤통수를 때리듯 발굴되는 숨은 이야기들은 나의 행보를 무겁게 만들어버리곤 하였다. 도무지 아는 게 없어 보이게 만들고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마치 생애의 기억조차 저장을 할 수 없는 무뇌아(無腦兒)처럼 때론 고독한 파수꾼으로 만들어버리는 새로운 이야기들. 그 동안 지역 알음에 자부심(自負心)을 가졌던 기억들이 오히려 자부심(自腐心)이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러다가 주변머리마저 빠져버린다면 고독한 대머리 독수리처럼, 역사비평가들이 먹다 남긴 음식이나 뜯어먹으며 살아가야할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게으름의 밭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인천관련 자료들이 마치 경쟁하듯이 쏟아져 나오는데 매우 반가운 일이라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개인적 아쉬움이 동시적으로 교차되어 소용돌이치고 마는 마음은 도무지 진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음도 고백해 본다. 정신적 게으름이었고 일상에 대한 나태였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게 부위별로 입맛에 따라 조리되는 강제적 음식일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역사의 정확성은 없다고 본다. 요리라는 문화적 관습은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변화를 주는 가운데 창조라는 간판을 반복적으로 내거는 일종의 이벤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인천 관련 자료들이란 게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서 발간된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천의 역사가 판단되어지는 상황에서, 마치 인천이란 공간을 극화시켜서 싸잡아 평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큰 열쇠구멍을 가진 좁은 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오늘날 개략적이나마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알릴만치 이뤄놓은 성과는 그래도 간난의 길이지만 성실하게 걸어왔던 선배들의 따뜻하고 뜨거운 노고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너무도 우직스러웠다. 툭 까놓고 얘기해서 밑 빠진 항아리에 물 깃는 일이었고 동시에 생활고를 풀 수도 없는 길이었다. 국소적이며 제한된 지역성에 따른 편협주의를 생산하는 길이자 과거지향적인 지역 국수주의자를 양산했던 길이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토박이에 의한 토박이를 위한 토박이 중심적 사고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말로 변론하고 싶다. 인본민주주의적인 시각과 인류애를 지향하는 아우름을 통해서 이 땅에 터를 잡아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제 삶의 부지 처인 인천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놔두자는 얘기다. 마음에 우려를 껴안고 말하는 두 번째 고언은 이제부터라도 역사가들의 비판에 따라 거론되는 인천의 역사 말고도 인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을 심도 있게 구성한 일련의 기록들을 철저히 남기자는 얘기다. 십수 년 전에 ‘뿌리 깊은 나무’에서 추진하다가 정치, 경제적 어려움으로 중단된 ‘열전’형태의 책들이 좋은 본보기라고 본다. 필자의 이야기가 삼천포에 빠졌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밀려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신포동 사랑에 대한 열정의 지나침으로 봐줬으면 좋을 상 싶다. 잡스러웠던 너스레를 너그럽게 이해해주었으면 싶다.
근대 문화의 도가니였던 신포동
신포동은 잡스러움을 하나로 묶어냈던 한마당이었다. 서양의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때로는 민족과 민족이 남우세스럽게 시리 백주대낮에 온몸으로 애무하던 신천지였던 것이다. 세계 각국 문화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생생한 현장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역사의 ‘난장’이었다. 신포동에는 아직도 일본과 중국 그리고 서양풍의 모습을 지닌 흔적들이 그 알몸을 원색적으로 내놓고 있지만 특정 지어서 판단 내리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 것은 시대를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포동이 근대 시대에 다문화 공간으로써의 도가니 같은 구실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무자비함이 견고하게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해야할 공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지금은 월미관광특구 지정에 따른 구도심 복원사업과 더불어 재래시장 활성화 방안이라는 주제를 걸고 개발의 바람을 급속도로 타고 있지만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신포동은 키 작고 볼품없던 여느 재래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필자가 살았던 ‘신포시장 1길’은 큼직큼직했던 중국인들의 야채 점포와 정육점, 신발가게가 일렬로 도열해 있기도 했다. 동인천 역으로 빠져나가는 큰 길 건너편에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만든 답동성당이 답동 산 3번지에 우뚝 서 있고, 신흥초등학교 방향을 바라보고 현재 누리아파트가 들어선 곳에는 일본인 절 동본원사가 시온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었다. 시장의 윗길에서 만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방향으로 영국의 성공회 교회가, 그 바로 아래쪽에는 당시의 인천시청 구실을 했던 감리서가 있었고 이들을 꼭짓점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움푹 파인 저지대에 신포동 일대가 거대한 가마솥단지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여 졌다.
인천여상 자리에 있던 인천신사, 일제에 의해 건조된 동양 최초의 수문식 도크, 돌로 지은 우체국, 조일 상선 주식회사의 우람한 건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급 카페 금파, 일본식 요리점 화선장, 타운젠드가 운영했던 한국최초의 스팀식 방앗간인 담손이 방앗간, 이들 보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임금의 초상을 그렸던 어용화가 김은호의 이당기념관 등이 에둘러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포동을 핵으로 놓고 봤을 때, 이들 모두는 신포동의 주변부에 있던 역사적 상황들의 다세포조직에 불과했다. 신포동은 이들 다세포 구조를 유기적으로 묶어낼 수 있던 한마당이었고 중심이었으며 힘없는 목숨들을 단단하게 부지하게 했던 바탕질이었던 것이다. 신포동 주변부에 포진해 있으면서 이 땅의 주인 노릇을 해 왔던 당시의 세력들은 필연적으로 중심부를 딛지 않고서는 제대로 누릴 수조차 없는 절름발이 생활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개항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었다면 하부구조적 삶을 꿋꿋하게 연명해온 민중들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주인으로서 그 깃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포동을 정의 내리기에는 아직도 석연찮은 구석이 분명히 존재한다. 특징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정체성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것도 정체성이 될 수 있으므로 신포동을 근대문화의 도가니라고 지칭해도 별 다른 타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신포동 밖에서 신포동을 묻다
신포동에서 답동성당 쪽으로 가는 길.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늘 궁금했다. 시대와 사건 등을 다루는 통상적인 역사 연대분류 내지는 평가는 후대의 전문사가들에게 미루고 상상이 넘나드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예를 들면, 답동성당 입구 맞은 짝 편에 있는 인광철공소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이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 일제 강점기에 지은 건물이지만 내부는 철강으로 기워내고 엮어내 군데군데가 위태롭게 보인다. 그런대로 건물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거니와 대를 이어서 가업에 종사하고 있는 초로의 아들 또한 왠지 모를 스산함을 연출하고 있다 라든지. 일방통행 길을 따라 쭉 따라 올라가면 경동 목욕탕 앞에 모자원 자리는 일명 서탕(曙湯)이라 부르던 1930년대 한국인 전용 목욕탕이었던 곳. 지금 생각하면 위험스러웠던 추억이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시나브로 떠오르는 곳.(물론 당시의 이름을 간직한 것은 아니지만) 다섯 째 형님의 잔등에 뜨거운 물을 붓고 아버지께 엄청 두들겨 맞고는 벌거벗은 채 목욕탕 밖으로 쫓겨난 기억이 숨겨져 있었던 곳이라든지. 아직도 새록새록 소름 끼칠 정도로 떠오르고 있지만. 조금 더 오르막을 오르게 되면 미로처럼 얼키설키 이어지는 골목길 일대가 한 때는 창녀촌이었는데, 그 곳 주민들은 어떻게 살았고 코앞에 위치한 근엄한 답동성당과의 지척관계로 보아 어떤 분위기를 연출했는지. 게다가 그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박문학교며 해성보육원이며 수녀원이 있었는데 그 지리적 상관관계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못내 궁금하기도 했던 점을 둘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 신포동의 주변부부터 둥그렇게 훑어 내려오면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모해 왔던 동네의 정체가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 윤곽이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에 미묘한 애증들이 소화되지 않은 채 가슴팍 체증으로 남기도 했다. 이렇게 점을 찍듯이 미리 예견하는 데에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말고도 시대가 무엇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이고 무엇이 요구되는 지에 대한 숙제풀기의 타당성을 좀 더 유연하게 찾자는 것이 필자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증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치료법이 필요했다. 쓱쓱 문질러주던 방식을 버리고 엄지손가락을 실로 묶어 적당히 머릿기름을 묻힌 바늘로 따는 방법을 택했다. 피를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하는 일에는 적당한 방법이 없다. 살갗을 뚫고 그야말로 피가 나도록 찌르는 일 뿐이었다. 진실로 피를 봐야 낳을 거란 믿음에 확신을 가졌으므로 필자의 앓음 알이 행보는 이렇게 시작하게된 것이었다.
신포동이 근대 역사의 텃밭에 뿌리를 내리고 그 나이테를 하나씩 늘려가는 과정은 근대 도시 생성 과정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충돌 현상인 카오스 그 자체였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 정돈하기에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생명체였다. 따라서 그 정체성을 그려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인류 태초의 모습이었을 혼돈이었던 것이다.
개항로를 거닐다.
그러나 ‘일즉다 다즉일(一則多 多則一)’. 신포동을 읽으면 전체를 알 수 있고, 전체를 바라보면 신포동의 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신포동을 읽기 위해서 먼발치에서부터 점진적으로 파고드는 각개전투에 참여한 병사처럼 배다리를 등지고 물러서 있었다. 굳이 배다리를 말하지 않아도 배다리라는 지명이 바다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그러나 유년기에 서린 상념의 잔영들이 동영상처럼 부득불 떠오르는 연유를 무턱대고 지우기만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배다리는 비만 왔다하면 단골로 침수되는 인천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비교적 최근인 1987년에는 장맛비로 인한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필자의 기억의 팔레트 속에 온통 빨강 깃발과 흰색 윗도리로 기억되던 그 시기에 부친의 교통사고 소식은 길거리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필자를 배다리에 위치한 모 정형외과 아버지 병상 앞에 묶어놓았다. 두 달여를 그렇게 지내던 차에 내리는 장맛비에 대한 감상은 “이젠 두 다리 펴고 잘 수 있는 세상의 도래에 대한 막연한 기쁨”이었는데, 웬걸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점점 불어나는 비의 세례는 도리어 저주에 가까운 듯이 쏟아 붓고 있던 것이었다. 기어코 병실까지 침범한 장맛비를 탄하며 불안해하시던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애꿎은 간호사들만 달달 볶질 않았던가. 여하튼 배다리는 바닷길에 가까웠으므로 상습적인 침수 지역이었고 자질구레한 추억들이 비올 때마다 부표처럼 부상하는 곳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배다리를 뒤로 물린다는 것의 의미는 개항로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배다리보다 더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개항로 초입부터, 수상한 조짐이 엿보이는 골목길에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소금창고로 사용했던 붉은 벽돌 건물이 **서림이라는 간판(손수 붓글씨로 쓴)을 내걸고 사전류만을 전적으로 팔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노 주인에게 몇 번의 양해를 얻어서야 겨우 둘러볼 정도로 근대적 아성을 결코 일반인에게 내줄 수 없다는 듯이 폐쇄적인 분위기였다. 몇 년 치를 하루도 빠짐없이 모아둔 신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는 것만 봐도 주인의 까탈스러움은 여실히 드러나 보였지만 퇴색의 기력 이면에 녹아든 당당함이 건물의 오랜 이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개항로는 말 그대로 개항로였다. 인천이 근대 개항장으로서 부산에 이어서 각광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수도와 인접해 있다는 거였다. 어쨌든 수도는 나랏일을 도맡았던 곳이었으므로 외래인들의 입장으로 봐서는 직접적으로 각국의 영향력이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효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인천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항로는 인천에 정착하거나 개발하기 위해 개설되기 보다는 수도를 향한 필연적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개항로는 이런 점에서 서러운 양면성을 띈 것이라 하겠다(경인철도도 마찬가지이다). **서림을 빠져나와 개항장으로 향하는 거리는 오래된 기억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현재는 가구점 거리로 이름 붙여져 활발했던 개항 당시를 재현하고자 기를 쓰고 있지만 대형마트라는 공룡에 밀려 초췌함을 벗어던지기에는 안쓰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레이디 가구점 자리는 인천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항도 백화점’이 자리했던 곳이다. 아직도 4층 건물의 위용(소방도로 개설에 따라 일부가 잘렸지만)이 건재해 보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근대 시기에 만들어진 최신식의 백화점이었다는 사실을. 백화점에 대한 내력과 상세한 이야기들을 뒤로 물린 채 싸리재로 향했다.
다시 신포동으로 들어서며
아직도 싸리재라는 지명 대한 해석들이 제각각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갯길을 십여 미터나 깎아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제법 높은 둔덕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치(峙=높은 고개)나 악(岳=큰 산)은 분명 아니었겠지만 싸리재 일대는 제법 너른 둔덕들을 밴 산이었다. 이른바 ‘긴담 모퉁이길’과 싸리재 길이 근대적 도로의 형태를 띠기 전인 1909년 만해도 몸뚱어리 각각의 작은 꼭짓점에는 답동성당, 동본원사(현 누리아파트), 이하영 별장(현 몰몬교회), 일본 군인묘지와 역무별장(力武別莊=현 시립도서관과 성산교회, 율목공원)이 포진해 있었다. 이러한 모양새에서 현재의 길이 된 것도 어언 일백년의 성상이 묻어났음이다. 어쨌든 싸리재를 넘어서자마자 헐떡이던 심장박동이 가실라치면 복잡한 도심 속에 움츠려 있던 바다 냄새가 불쑥, 튕겨져 나옴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거미줄처럼 짜임새 있게 늘어선 거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야 근대 개항장의 숨결을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근대 역사의 건널목들을 지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삼대가 운영했던 대제 한약방을 지나야 했고 미두거래로 거부가 되어 숱한 염문을 뿌렸던 신신 예식장 터 주인을 지나 애관극장을, 그리고 유모 탤런트의 아버지가 주지로 있었던 능인사, 통일다방, 인천 최초의 교통 신호등이 설치되었던 경동 사거리... 사거리를 건너자마자 모꾼청(募群廳) 터, 그 유명세를 떨쳤던 경인면옥 냉면집, 인천 최초의 도선사였던 유항렬의 주택, 우여곡절이 많았던 정치국의 가옥 터, 일제 강점기에 인천의 돈을 주물렀던 금융조합(현 중소기업은행), 일본인 어시장에 대항해 우직스럽게 어시장을 개설했던 정흥택 형제의 어시장 터 등등을 지나야 했다. 이렇게 지나서야 겨우 근대의 바다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필자가 ‘근대’라는 부분에 굳이 방점을 찍어두는 이유는 인천 지역이 1600여 년 전에 이미 개항을 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개항이라는 어감(자주적이냐, 외부적이냐 하는 교차된 인식)이 주는 바를 딱히 집어서 말하기에는, 현재라는 공간성 인식과 그 평가가 편협주의의 그물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좀 더 시간을 두고 봐야할 일이다. 따라서 신포동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신포동을 주변부로 볼 것이냐 아니면 중심부로 보고 출발할 것이냐에 따라 신포동의 얼굴은 팔색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천부경의 일부를 빗대어 신포동을 응시하면서 갈음하고자 한다.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하나에서 시작하나 그 시작이 없고, 하나에서 마치나 그 마침이 없다).
200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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