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내게 짬뽕 좀 약올려봐

濟 雲 堂 2010. 1. 26. 01:01


 말이 그렇지만, 마음에 점을 찍듯 먹겠다는 점심(點心)에 무얼 먹을까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특별한 식사모임이 아닐 바에 간단한 먹을거리로 배를 채우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점심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들 가운데 중국집(중화요리 집) 운운하며 먹을거리를 떠올리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짜장면 아니면 짬뽕을 시키곤 하는데, 거의 모 아니면 도 수준에서 크게 다를 바 없이 양자택일하는 경우의 수로 음식을 주문하는 게 보통의 모습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만 해도 이러한 양자택일의 반열에 오늘날과 같은 짬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우동 아니면 짜장면이 중화요리로 상징되는 중국집 상차림의 대세였기 때문이다.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을 되돌려 소위 추억의 명장면이랄 수 있는 낡고 허름한 중국집 풍경을 떠올려 보면, 여지없이 이빨 빠진 대접 속에 김 모락모락 펴오르는 우동 혹은 짜장면과 대궁 끄트머리가 닳아빠진 대나무 젓가락을 집어든 얼풋한 주인공인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인천을 추상명사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뇌수에 잠식된 인천 이미지 가운데 대표적인 물어(物語)들은 불과 손에 꼽힐 정도로 빈약하기 그지없다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청관이 그렇고 자유공원, 수문식 도크, 연안부두, 염전, 여기에 오늘날 가세한 송도 신도시 등이 그렇다. 인간의 상상력을 제압했던 지난 시대의 빈틈없음 또는 폭압적 통치의 대명사로 불리던 군사독재 시절을 겨우 통과한 사람들의 뇌리에, 빈틈없음 속에 빈틈, 폭압 속에서도 자유의 기지개가 언젠가는 켜진다는 걸 자득할 무렵. 그러니까 중국집에서 흰쌀밥 판매를 불허한 1973년에 무더기로 나동그라질 위기에 놓인 굴지의 중국집들이 획기적으로 내놓은, 아니 창조적으로 선보인 것이 짬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을 냈고 시각적으로도 뭔가 반항기가 절절 흐르는 강렬한 붉은 색조의 국물은 기존에 즐겨먹던 멀건 육수에 달걀을 적당히 푼 우동의 한계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 바로 짬뽕이었던 것이다.

 

 

 닭이나 오리, 돼지고기를 푹 곤 육수에 우리의 액젓 같은 티파롯을 넣고 숙주나물, 레몬 라임, 팍치(고수)를 얹어 그 위에 거칠게 빻은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태국 쌀국수 꾸에이띠여우와 이와 비슷한 베트남 쌀국수 포(Pho). 돼지고기를 우려낸 국물에 새우, 양배추, 당근, 카마보코(어묵 종류), 숙주나물 등을 넣은 나가사키 잔폰(ちゃんぽん)을 비롯해 중국 산동 지방의 청경채와 표고버섯, 양파 등을 곁들여 비릿한 맛으로 기억되는 차오마멘(炒碼麵) 등을 놓고 봤을 때, 인천 발 짬뽕은 맛과 색깔에서 단연코 두각을 내는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아니, 한국인의 입맛에 교묘할 정도로 맞아떨어지게 만든 인천 화교들의 작품이던 거였다.

 

 

 짬뽕이란 단어의 유래는 차치하더라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는 탐탁지 않은 뜻으로 와전된 경우로써 불리는 게 짬뽕의 실상이다. 섞인 것 또는 정통하지 않다는 의미로 폄하돼 부르기도 하는데, 기실 인천이란 도시의 본질을 논할 때 엄밀한 자가 검증을 거치고 객관적 타당성이란 채에 거르게 되면, 역사적으로 인천은 짬뽕처럼 다양한 유전인자의 거대한 조합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근대 개항도시 인천의 풍경들 특히 열강의 진출로 인해 지어진 근대 건축물과 흔적들을 보더라도 그 전모는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지계 내에 현존하는 수많은 일본인 건물들, 역시 청국지계와 그, 프랑스 선교회가 지은 답동성당, 영국의 성공회 교회, 미국의 내리감리교회, 독일과 러시아 영사관 그리고 기록에 올랐으되 그 흔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사람 등등. 아울러 전국 팔도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모여든 이주민들의 섞임이 없이는 인천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현재 인천이란 도시공간의 창출은 좀 더 복합적이고 대별된 문화유전자의 조합 즉 지난 세기에 짬뽕을 만들어낸 역사의 변증법적 소산이고 아직도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완성으로 향하는 미완의 노력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인정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짬뽕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농치듯 옆집 왕 서방이 거들먹거린다. 형, 오늘 점심은 내게 짬뽕 좀 약올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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