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와 우각리(牛角里)의 형성과 변천
- 배다리 관통 산업도로에 대한 몇 가지 역사적 전거와 그 교훈을 위하여-
이종복(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개항장역사문화연구소장)
<목차>
여는 말. 1. 근대개항과 일제강점에 따른 인천의 공간 변화 1-1. 인천 앞 바다의 매립 1-2. 경인철도의 가설 1-3. 외세의 침투와 일제강점에 따른 조선인 거주지의 변천 2. 배다리와 우각리의 형성 배경 2-1. 배다리 2-2. 우각리 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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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사람은 자연 환경에 따라 그 정체성이 규정지어진다. 지배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인, 대립구도가 아닌 유기적인 섞임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 보편적 삶의 정의다. 특정한 지방의 개성을 소위 지방색(Local color)이라고 한다. 지구적(地區的) 차원에서 인천 역시 지역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적 조건들이 인천이라는 도시를 형성하는 뼈대라면 역사와 문화는 인천의 피와 살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천은 바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도시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도시의 형성에는 모세혈관처럼 세분화되고 다양한 삶과 그 주거형태들이 유기적인 축을 이루어 미시지역을 만들어 확대해갔으며 또한 지역 내에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환경이 되기도 하였다.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더불어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포진해 있던 관교동 일대가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떠맡을 수 없게 되자, 제물포 포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대의 근대적 도시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다. 마침내 4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인천도호부를 폐하고 ‘한촌(寒村)’1)이나 다름없던 탁포(坼浦.터진개) 언덕바지에 ‘삼문(三門)에 하이칼라 장식의 유리창’2)이 달린 인천감리서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천의 행정 중심축 이동은 근대 문물의 접점지인 제물포 일대를 새로운 세기적 변화의 핵심으로 부각시켰고 나아가 한반도 역사의 판도가 급변하고 있음을 예고해주는 기폭제 구실을 하게 만들었다.
1.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는 터진개 일대를 ‘낡고 한적한 어촌 마을’로 표현하고 있음.
2.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단기 4292년. 경기문화사
1. 근대개항과 일제강점에 따른 인천의 공간 변화
1-1. 인천 앞 바다의 매립
근대 인천의 개항은, 앞서 말했다시피 행정 중심지의 위치 이동을 자주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제물포 일대로 몰려드는 서양 열강의 무역상과 중국, 일본의 정치 세력들과 그 거주자들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세를 불려나가는 데에 집중돼 있었다. 일찍이 인천개항장을 선점한 일본은 전관조계 요구에 따라 7천여 평을 이미 확보한 상태에서 날로 늘어나는 일본인 거주자들의 거류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일본은 제물포(인천 역 부근)쪽 청국조계 5천여 평과 맞물려 있고 응봉산과 터진개 일대의 외국인 공동조계(각국지계) 14만여 평에 둘러 싸여있는 상황에서 확장이 불가피해지자 1887년 조선 정부에 해안 매립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각국사신들의 반대로 곧바로 추진되지는 못했으나 1898년 인천일본인조계확장에 대한 각국사신협정서가 조인되어 급기야 사도(沙島) 일대를 매립, 이듬해 완공을 보게 된다.1) 그러나 인천 앞 바다의 매립은 우리에게 외세에 의한 최초의 영유지 확장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게 되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인천의 조계지가 완전히 철폐되는 1914년부터는 일제강점에 따라 화개동(선화동 및 신흥동), 만석동, 수유리(화수동), 송림동, 십정동 등지 일부를 차지하던 매립이 용이한 개펄 일대를 육화(陸化)하게 된다.2) 현재 만국공원의 응봉산, 화도진지 일대, 괭이부리(猫島), 수도국산으로 불리는 송현산, 부처산이라 불려지던 송림산, 광성고등학교의 돌산, 신흥동1가와 율목동, 신흥시장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인천시립도서관 구릉 등 대표적인 구릉지를 제외한 개항장 일대 저변(底邊)은 거의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매립지 또는 매립의 기초를 닦은 곳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3)
1. 인천부사. 1933년
2. 상게서
3. 인발연. 인천지형의 변천과정 연구조사 보고서 2004.
1-2. 경인철도의 가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의 발발로 청군의 개입을 요청한 조선정부에 대응해 무력으로 군대를 파견한 일본은 이듬해 청일전쟁을 치르게 되고 결국 승리해 조선에서의 막강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후 1895년 민비시해 사건과 1896년 아관파천 등 국내정치권의 혼란을 틈타 일본보다 먼저 경인철도부설권을 먼저 획득한 사람은 호레이스 N 알랜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던 미국인 제임스 모오스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반기를 들어 당시 외무대신이던 이완용에게 재심을 요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인천일본인철도인수조합에 철도 부설권이 넘어가는 격랑을 거치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철도 가설에 대한 개괄적인 배경이다. 1)
을사늑약에 따라 외교권을 장악, 국권을 대역했던 일본통감부 시절에 인천부가 발행한 ‘인천시내철도변천약도(仁川市內鐵道變遷略圖)’에 의하면, 1897년경의 경인철도 라인은 인천신사(현 인천여상) 앞을 시발지로 신흥동1가와 유곽 사이를 지나 닥터 알랜 별장 동남쪽에 설치한 우각 역을 거쳐 주안, 부평, 소사, 오류동, 영등포,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선로가 처음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철로 가설에는 현재의 인천 역을 시발지로 삼아 상인천 역(축현 역), 우각 역, 주안 역으로 이어지게 되나, 이후 1906년 닥터 알랜이 본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우각 역을 폐지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2)
1. 이현희. 한국철도 개통비사, <철도>. 1964
-<경인철도 건설의 일본 정부 사전 승낙의 필요 건>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항의 공문-
2.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1957
1-3. 외세의 침투와 일제강점에 따른 조선인 거주지의 변천
1876년 운요오호(雲揚號)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의 개항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개항이었지만 일본만을 위한 독자적인 문호개방은 아니었다.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주장하는 중국(청)의 견제와 아시아로 식민지시장을 확장하려는 서양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과 정치적 목적이 농축되었던 것이 인천의 개항 사건이다. 자국의 정치력을 등에 업고 시장 개척에 나선 외세가 인천을 점권(占勸)하고자 열망했던 이유는 한반도의 지리적 중심에 있다는 점과 함께 수도와 인접해 있다는 요인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조계설정에 따라 인천에 자국의 깃발을 내건 나라와 상사(商社)를 열거해보면, 전폭적인 국가적 지원을 등에 업고 진출한 일본과 중국을 위시해서 영국의 이화양행(怡和洋行.1883)과 광창양행(廣昌洋行.1906), 홈링거양행(咸陵可洋行.1896), 독일의 마이어양행(世昌洋行.1884), 미국의 타운센드양행(陀雲仙洋行.1885) 등의 거상들이었다. 종교 및 의료시설로서는 응봉산 동편 자락에 영국의 성공회 교회와 성 루가 병원(1890), 그 아랫길로 미국의 감리회 소속 내리예배당(내리교회.1885), 답동 산 언덕바지에 프랑스의 제물포교회(답동성당.1889) 등이 비교적 고도(高度)의 위치에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1) 또한 일제강제병합시기를 전후로 해서는 봇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일본인들과 그 시설들이 인천 전역을 드넓게 차지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거처를 잃게 된 인천사람들은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국권을 상실한 민족이 당면했던 뼈아픈 현실이기도 했다. 2)
인천의 개항 사건은 구 도읍의 역할불능과 공동화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원인천 지역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오군란(1882), 갑오동학혁명(1895) 등 내적인 혼란기를 겪으며 궁핍할 대로 궁핍해진 민중들에게 인천의 개항은 새로운 삶의 기력을 되찾게 해주는 기회의 땅으로 비춰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력의 급격한 유입 현상이 발생하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이 조선인 취락지를 집약적으로 만들어가는 상황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3)
1. 교육시설을 비롯해 숙박시설, 점유지 그리고 중복지등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였다.
(예; 영화학교, 해성보육원(고아원), 여선교사 기숙사, 남선교사 기숙사, 월미도 러시아저탄창고, 월미도 스탠다드 석유주식회사 창고, 만국공원 내 존스톤 별장, 세창양행사택과 제물포 구락부, 영국영사관, 청국영사관, 일본영사관, 러시아영사관, 신동공사, 송현배수지 등)
2. - 민씨 일가의 월미도조차지 월권남용에 따라 적은 배상에 원주민이 강제로 이주당하는 사건.
- 화폐제작을 담당했던 전환국을 설치하면서 당시에 살았던 주민들을 송현산 일대로 강제 이주 시킨 사건 등. <인천개항100년사. 인천직할시. 1983>
-주)일제강점 이후에는 가히 폭발적인 매립역사와 병참기지화에 따라 조선인 거주지역은 제물포 외곽지역으로 밀려났으며 취락지 집중현상마저 초래하여 도시빈민촌을 만들기도 했다.<100년사>
3. 인천부사. 1933
2. 배다리와 우각리의 형성 배경
2-1. 배다리
현재 배다리라는 지명의 유래를 명쾌하게 밝힐 수 있는 근거 자료는 전무하나 지명의 기능적 측면에서 그 연관성은 지리적인 개연성이 매운 높은 지명이라 하겠다. 현 만석동 동부제강 앞길에서 삼두 아파트로 진입하는 삼거리에 바닷물의 유입을 조절하는 통로가 있어 수문통이라 불렀다. 내수의 길은 다시 중앙시장 중앙을 가르고 좁다란 갯골이 되어 현재 배다리 철교가 놓여져 있는 곳까지 개펄을 이루고 있던 점을 든다면, 분명히 바닷물 유입의 정황들이 지명으로 고착돼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배다리라는 지명은 인천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었으며 그 사용처가 분명해 바다 또는 하천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인 지명이라는 것을 다음의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일본인 片倉組가 대동강 船廠을 탈취하고, 上田充은 한강의 마포 배다리를 가설하였다.
-梅泉野錄 제6권 隆熙 4년 庚戌(1910년)-
水原郡 隱德面 ‘배다리’라는 곳에 있다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21권 국한문-
배다리 근방에 少年竊盜(仁川)
-동아일보 1937년7월7일 조간-
煙針中毒者가 川中溺死, 배다리근처 개천에 빠저 죽은 아편환자=마포 배다리
晋州南江交通不便, 배다리가 문허저서
-동아일보 1923년 3월21일-
두 名 죽고 10名 負傷「배다리」내려앉아 慘事 釜山에서
-동아일보1962년 5월 26일-
공주 배다리 밑에 노인사체 표류, 경관의사가 검시한 결과 맹인으로...
-중외일보 1930년 9월 23일-
현진건 소설‘빈처’에 배다리 등장
「요리집 三成館은 손님이 업시 2층이 캄캄한데 뽀이들이 短簫만 불고 잇고 日月館이라야 米店 주인 한패가 장고를 뒤들길 뿐 米豆場 쓸쓸해진 인천의 유흥장은 去勢를 당한 것 갓다. 열시 반이나 되여 活動寫眞 愛館 압흘 직혀보니 모다 나오는 客이 2백 명쯤 될가 한데 학생도 적고 여학생이라고는 단 세 사람 저의끼리 뺑손을 치고 맨 나종에 나오는 기생 두 사람이 공연히 이 골목으로 갓다 저 골목을 나왓다 하면서 극장 사람과 弄지거리를 하다가 도라갓다.싸기로 유명한 인천 참외 경성 가트면 5錢짜리를 1錢씩에 사서 맛보고 배다리를 넘어서 敷島町을 가니 여긔가 遊廓 이것만은 히야까시 客이나마 만치 안어서 아씨들이 바느질만 하고 안젓난대 배 부리는 얼골 검은 사람 수염 털보 맨 저고리 바람으로 『족곰 덜 하렴으나』하고 흥정하다가 그냥 다음 집으로 가고 가고 하는 것이 서너패 잇슬 뿐이다..」
-별건곤. 15호. 1928년. ‘본지기자 오대도시 야음 대 탐사기’-
앞서 1장에 거론했듯이 인천의 도시 공간 변화에 있어서 조선인의 집단 취락지 형성 배경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았다. 해안의 매립, 철도의 가설, 외세와 일제강점에 따른 강제 이주 등과 국내의 정치적 불안 요인, 경제적 피폐 현상의 타개책으로 인천 이주가 그 요인이었다고 정리하였다. 바꿔 말해서 배다리 일대를 중심으로 주거 변화를 꾀했다는 것은 외적인 요인이 더 컸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민족적 상처는 부풀어 갔을 것이고 삶의 형태소들 또한 다양하게 자리 잡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현상이라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다리 일대의 조선인 주거지 형성은 외압에 의해 쫓겨난 조선민중들이 저항과 생존을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돼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2-2. 우각리
仁川警察署 管內 京町을 外里로, 牛角洞을 牛角里로
舊邑을 官廳里로, 富平을 富內로 -朝鮮總督府官報 1914.11.16-
조선총독부의 지명 개칭에 관한 조항 가운데 위의 ‘관보’는 우각리의 지명이 원래 우각동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각리, 우각동 등의 지명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은 쇠뿔고개와 황골(황굴)고개였다. 황골고개는 큰골(서울)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함인데 이 고갯길을 가로질러 가로로 쇠뿔처럼 휘어지듯 도원동에서 송림동으로 이어진 횡단 고갯길을 쇠뿔고개라고 불렀다.1)
황골이라는 단어가 주는 연상 작용과 맞물려 인천감리서가 내동에 설치됐을 당시에 감리서가 주재한 사형장이 이 고개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 사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은 없다.2) 황골 고갯길이 제물포 개항장에서 출발해 수도로 넘어가는 ‘경인가도’였다면 쇠뿔고개는 전형적인 농촌을 가로지르는 언덕길이었다. 어림잡아서 우각현(峴) 또는 우각리(里)가 역사 기록에 등장하던 시기를 개항 이후로 추산할 수 있다.3) 특히 우각현은 고종의 어의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을 세운 호레이스 N 알랜의 하계별장이 있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역사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알랜은 1884년 의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했지만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이기도 했다. 민영익의 치료를 계기로 고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일국의 공사를 역임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던 고종의 황장(皇庄.황제의 땅)을 알랜 별장 곁에 둘 만큼 우각현은 정치적 기류를 몰고 다니기도 했던 곳이었다.4) 1897년 3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기공식이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이 일대는 급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되었다. 미국 감리회 여(남)선교사 기숙사, 영화학교(우각리 이전에는 내리에 있었음) 등이 들어섰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덕생원(전염병담당병원. 중앙여상 자리), 도축장(동구청 자리), 일본인 화장장(현 숭의 운동장 건너 주차장. 이전엔 소방서 자리), 보각사, 창영학교 등이 우각리 일대를 드넓게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5)
1. 인천광역시. 인천의 지명유래. 1998
2. 인천직할시. 인천개항100년사. 1983
3.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역주 (인천부읍지 1899), (동국여지지 1656), (여지도서 1760), (인천부읍지 1842) 등에도 상기 지명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4. 고종이 실제적으로 이궁(행궁)을 설치하지는 못했다. 알랜이 떠나고 난 후 별장(터)은 이명구 별장(이완용의 자), 계명학원(이성희 1927), 전도관(박태선 1956) 예루살렘교회(이초석 1984) 2008년 현재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조우성. 인천이야기 100장면>-
5. 고일. 인천석금 1955
닫는 말.
사람은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원인천 지역의 공간 환경은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사실을 앞서 기술했던 매립과 경인철도 그리고 근대 시대의 정치적 제 상황을 통해서 충분히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의 배후에는 역사적사건의 유기적인 연관성과 그 영향이 우리의 삶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충분히 느끼게 만든다.
근대 문명이 시간과 공간적 거리를 단축했다면 그 이기의 이면에는 전통의 상실과 새로운 공간 창출에 따른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음을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 근대시대가 우리에게 그러한 점을 전달하고자 했음을 오늘날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인천지역에서 행해지는 총체적 개발의 판도를 관찰해 보면 전통적 삶을 영위해 왔던 도시서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철저한 개발 논리로, 바꿔 말해서 근대시대에 서구열강과 일제가 자행했던 식민지 강압 논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예로 경인철도의 가설을 통해 인구밀집 현상과 도시 빈민화 현상을 수반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배다리 지역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즉 청라지구로부터 송도 신도시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광폭도로의 신설은 앞서 거론했던 식민지 시대의 개발논리, 역대 독재 정권의 밀어붙이기 개발과 신자본주의의 이윤 지상주의 논리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전통사회의 붕괴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다. 가뜩이나 경인철도의 양면적 이중구조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많이 보았을 인천지역의 입장에서 또 다시 남북으로 도로가 놓여져 공간이 절단된다면 그나마 어렵사리 존재해 왔던 역사, 문화적 공간들 나아가 도시서민의 삶을 지배해 왔던 전통적 환경은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길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원활한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지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위협하기도 한다. 배다리와 우각리의 공간성과 그 가치는 인천의 생성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해고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개발지상주의로 일관하는 현대의 비인간적 무모함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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