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아,아 배다리안

濟 雲 堂 2008. 6. 4. 23:53

 배다리 헌 책방 거리에서  pg. park. donga<cp. lee>

 배다리 관통 산업도로 철거 현장에서  pg. park. donga<cp. lee>

 배다리 양조장 앞에 놓인 배다리안 1 pg. park. donga<cp. lee>

 양조장 지붕 위의 배다리안 2  pg. park. donga<cp. lee>

 

 

 인천의 옛 이름을 ‘미추홀’이라 부른다. 미추홀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단정내리기는 어려우나, 물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인 지명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바다는 육지의 울타리임과 동시에 호연의 기상을 나래 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의미한다. 멀리는 백제 시대에 중국과 통교를 했던 ‘능허대’라는 공간을 통해서, 가까이는 근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받아내 부침을 거듭해 국제적인 항구 ‘제물포’로 성장했으니 물도 보통의 물이 아닌 셈이다. 인륜지대사가 그렇듯이 성장통을 겪어야 하는 일면에는 일제강점기라는 뼈에 사무치는 세월이 인천을 관통하고 있었다. 근대 인천의 개항은 지난한 삶의 텃밭을 새롭게 일구려는 사람들을 흡입하게 된다. 전국 팔도에서 ‘새 하늘 새 땅’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은 인천이라는 도가니 안에서 처연하게 스스로 ‘인천인’을 만들어 가던 때였다.

 

 인천의 근대문화충돌 현상의 배후에는 일찍이 일본을 위시해 청나라,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관계로 ‘조계’가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지게 된다. 조계지에 발조차 디딜 수 없는 서러움, 그나마 살았던 공간에서 헐값에 쫓겨나야만 했던 약자의 아픔은 도시 곳곳에 초라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서민적이다 못해 앙칼스럽게 저항하는 몸부림으로 새로운 지명을 탄생시킨다. 그 대표적인 이름이 배다리이다. 괭이부리, 만석부두, 화수부두 등지의 주민들은 마음만 먹으면 바다로 통하는 길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갈 데까지 간 사람들, 더 이상 밀려날 데조차 없이 시대의 억압을 맨손으로 버텨 올려야만 했던 사람들은 오합지중일망정 단단히 얽어매고 위로를 아끼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 게 ‘원조’ 배다리 사람들이다.

 

 무자년 벽두부터 스페이스빔, 인천작가회의, 황금가지, 인천연대, 해반, 시민문화센터 등이 배다리 주민들과 살판을 꾸미게 된다. 죽임의 문화가 만연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개발만능주의가 판치는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함께 살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배다리안’이 되기를 결의했다. 살판의 군불은 배다리 문화축전으로 이어졌고 자주적인 인천근대문화 발상지에 대한 명예회복과 ‘참살이’에 대한 열망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가 '개선'이 아닌 '개악'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윗 글은 D일보로 송달했던 배다리 관련 원고의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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