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어느 겨울, 제물포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濟 雲 堂 2008. 3. 9. 14:07

 

두터운 외투의 절박함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해 잠시 유예시키려

훌러덩 벗어 제껴 아무렇게나 내려 놓았다.

그렇게 하고 싶을 만큼 유난히 기후 변화가 죽 끓듯 했었기에

아무렇게나 내려 놓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친구가 자료 모음에 보탬이 되라고 몇 장의 지난 사진을 건내준다

여느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사진이지만

수 십 여년이 지난 사진을 받아 들고는 여간 기쁨에 젖었던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어!, 어때, 넌 이런 적 있었어?"라며

뽐내며 찍은 사진은 아버지의 강압적 연출에 의했던 것이라고 우선 설명한다

 

여자 애들이나 타는 피겨 스케이트를 시커멓게 칠해서 탔지만

그 게 어디냐면서 기왕에 사진 찍는 거 웃으면서 찍으라는 주문이었단다

사진의 배경은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 운동장이다.

이 당시에 유행처럼 번졌던 학교 운동장을 얼린 스케이트 장은

일명 제고도 다를 바는 없었다.

롱-스케이트 날이 아닌 피겨-스케이트 날이 어린 사내 놈의 자존심을 조금 구기긴 했어도

얼마 안되는 입장료에 하루 종일 즐길 수 있었던 터라 무척이나

좋았었다고 이바구를 풀어 놓는 친구의 입가에는

이젠 이런 추억도 되새길 수 없는 시절이 돼버렸다는 푸념이 간당간당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와 아버지의 손 길이 제법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어느 한 때, 친구들도 그랬지만 나도 어렵사리 구한 중고 세이버 스케이트를 들고

염전에 물을 대 스케이트 장을 만들어 놓은 주안 일대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던 적이 많았다. 대표적인 스케이트 장이 '모던 스케이트 장'이었고 그 외에 신기촌 논 바닥이나 그라운동장, 정확히 말해서 그라운드 운동장 즉, 숭의 운동장으로 원정을 다니거나 내가 다녔던 신흥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가곤 했었다.

원정을 다녔던 이유는 제법 타는 스케이트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거나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가 주 목적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나도 스케이트가 있다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게 더 컸던 이유였다

어쨌든, 스케이트 장 한 구석에서 파는 오뎅은 그야말로 최고의 군것질이었음은 말할나위가 없이 즐거운 간식거리였다. 물론 돈이 있어야 했다

있는 거짓말 없는 거짓말 다 동원해도 없는 돈이 생겨날 리는 만무했던 때라

도둑질은 하나의 과정이었고 이른 바 나쁜짓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이 때 거의 터득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서 1974년 전철이 처음 운행을 했을 때 동인천 역을 비롯해 몇 개 안 되는

역전들의 행색은 비루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던 때였다.

동인천 역은 입구의 오른 편으로 삼성 체육관이란 보디빌딩을 위한 체육시설과 화물 하차를 위해 만들어진 통로가 함께 붙어 있었는데 공짜로 타기에 아주 적합한 공간이었고

주안 역은 기차의 머리 닿는 부분이 맨 논 바닥의 끝자락과 맞대는 부분이라

그냥 내려서 내달음치면 역무원들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던 곳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도 자주 그랬던 곳이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ㅋㅋ

유년의 비리를 캐자면 어디 한 두 개 뿐만이었을까?  

   

 

제고 운동장은 남달랐던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인천 최초의 종합 운동장이라 하면 그 의미는 더 증폭된다

1920년대 민족적 설움과 울분 그리고 신문물에 대한 갈증이 시연된 공간적 의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일제와의 대결구도에서 어떻게 하든 간에

이기려 했던 자주, 자립의 터전으로서의 공간적 의미에 무게가 뒤 받침 되었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934년 들어서 아까 거론했던 숭의 운동장으로 이 시설이 옮겨가고

인천중학교가 들어서고, 곧 이어 제물포 고등학교로 변신해 오늘에 이르는

역사가 비롯된 공간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시민의 역사가 잠재돼 있는 공간이었고

추억이 남겨진, 사진을 보면서 물밀듯 다가오는 유년의 회고가

빙하의 추억처럼 투명하게 드러나는 세월이 그저 즐거운 웃음을

간직하고 있는 듯 오랜만에 박장대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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