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옮기는 족족
신발코가 가리키는 방향이 목적이 된다
머리로 걷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길이 그렇다
한 걸음을 떼면
어느 한 존재감으로부터
그 한 걸음은
그 한 걸음 만큼 멀어진다
요즘 가죽포대에 담겨 있는
내용물들이 조금 버겁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침 식사를 거르다보니
열심히 일하고 난 점심무렵에는
밀려오는 졸음에 복갤 때가 많아진 것이다
화장실 거울에 내비치는 모습이 꼭 스모 선수같다
이목구비는 나잇살 만큼 적당한 조건부 얼굴을 지녔으되
몸통을 비롯해 아래로 눈썰미가 내려갈 수록에
어, 저 게 아닌데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무래도 저 거울은 스무살 적 추억에 사로잡힌
나르시소스의 환각을 비춰주는 요지경인가 보다
팔자(八字)로 걷는 모습이며
머리카락 휘날리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어
당당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누군지... 알겠더라구요... 라고 말꼬리, 눈꼬리를 내리며
�조리듯 생략되는 말들이
화장실 거울을 보고
확실히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웃기게 변했군
스모 선수야
아니, 난장이 똥자루야 라고 정의 내리고 말았다
한 걸음을 떼고 난 후에 느끼는
존재의 이질성에 학을 떨다가
좀 더 걸으니
어느 틈에 그랬냐는 듯 다시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 놀라운 변화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땐 역시 머리로 걸어선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온몸으로 걸어야 한다는 것과
이해관계에 집착을 해서도 안된다는 걸 말이다
그런 와중에 나를 즐겁게 하는
장면을 발견한다
다소 생뚱맞은 그림이지만
본질과 현상, 이상과 과거 시점이
절묘하게 표현된
그냥 그림일 뿐이라는 것
한참을 걸은 뒤에 비로소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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