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유리가 대량으로 제조된 시기는
1928년 4월부터이다
물론 소규모 공장이 송월동에 설립되어
약병 과자병 어항 등을 만들었지만
1905년 시기였던 점으로 보아 그 규모는 보잘 것 없었으리라 본다
만석동 유리제조소의 규모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을 만큼
세계적인 규모로 당시에 중국으로 수출했을 정도로 번창을 이루었었다
조선 각지에서 거둔 조세를 임시로 보관했던 해안을 일컬어
만석, 천석 하여 만석동이라 이름 지어진
이 곳을, 일본인 이나타(稻田勝彦)가 백만평 넘는 해안을 매립했고
그 위에 인천유리제조소를 세운 거였다
어쨌든 1957년 2월 이 공장 부지 위에 인천판유리공장이 기공식이 열기고
이듬해 9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공장으로 기록되는
인천판유리공장이 설립돼 가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실험실은 1928년에 만들어진 인천유리제조소의 본관 건물로
이 건물 귀퉁이에 자리 잡은 실험실 내부를 찍은 사진이다
알 수 없는 실험도구이다
아마 이를 전문적으로 사용한 이 공장 실험실 사람들은
이 도구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짚어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인천판유리 공장에 남아 있는 것은
1976년 3월 5일자에 만들어진 붕대와
지금은 만들지도 사지도 않는 신신제약에서 제조한
신신 사리반이란 반창고 그리고
낡아빠진 의료부 완장과 작은 붕대 하나였다.
세월이 흐르고, 쓸모없어진 시대의 뒤란에는
이렇게 흔적만 남을 뿐이었다.
한 때, 인천 경제의 밑거름이라 자부했던 유리공장도
인간사의 그늘로 사라진다는 소식에
다급히 디카를 들고 찾아 갔지만
필자를 반기는 건 곧 허물어져 없어질 구 시대의 건물들과
어느 구석에서 찾아낸 의료 도구들 뿐이었다
사람도 그런가?
한 시대의 삶의 에너지라고 믿었던 사랑이
세월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고물도 되고 유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
수고했어~!
잘 살아 온 게야 ^ ^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고 나오는 순간
뒷덜미에 냅다 내려 꽂히는
만석부두 괭이 갈매기의 애절한 이별조 가락이
자꾸만 따갑게 느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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