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빛으로 둘러싸이는 횟수가 많아진다.
빛에 노출되면 될 수록에 자신의 영역은 확실해지고
한 점으로 살아가는 動線의 실마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복잡한 複線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평에서의 나의 삶을 反芻(반추)해 보니
꽤나 많은 행적을 드러내며 내가 사는 곳.
이 곳 저 곳을 부지기수로 더듬어 다닌 것 같다.
山頂 높이 172m. 청량산을 올라가 보니 나의 삶이,
나의 행적들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인다.
서남쪽의 암벽을 통해 기어오르는 동안에
마음속으로 얕잡아 보았던 산정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수도 없이 올라 보았을 사람들의 대열에서
그 경험의 일부 됨을 자각해 보지만,
완만한 흥륜사 절의 범종 사이로 흐르는 산책로를
굳이 선택하지 않은 것은 깎아지르듯 가파른 암벽을
일직선으로 오르면 정상이 훨씬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시간이 빠르면 빠르게 지나갈 수록에 현실로 누적되는
겸허의 공기는 신선하고 달게 느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어둠이 익숙하질 않다.
하루 종일 곤두 서 있던 시신경들은
해방의 안식을 맞이하는 시간대가 돌아 오면
노곤해진 육신을 어둠 속으로 쳐 박아 대기 일쑤다.
혹은 육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본능이 더듬어 가는 사이에
肉德도 德이라고, 어둠이 내려 준 선물이라며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唾液(타액)을 이부자리에 적셔 놓기도 하였다.
어둠을 뚫고 스며 들어오는 가녀린 등불로 인하여 나의 물고기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筆墨의 바다를 유영하지 않았던가?
빛이 끄집어 놓은 사물이라는 걸,
억지 춘향 격으로 萬事如意라고 해석해 보았다.
혹은 一切唯心造라고 조심스럽게 정돈해 보았다.
정돈해 놓고 보니 자연적으로 구성된 것이 별로 없다
자연적이다라고 하는 개념이나 근대적이다라고 하는 개념은
서로를 확정적으로 규정하는 개념 정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우리가 사는 데에 과연 이러한 정리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곱씹어 보니 역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자연적인 것의 반대 개념은 필시 인위적인 것일 게고, 근대적인 개념 또한
전 근대적인 뜻으로 보면 사고의 多難性은 쉽게 풀이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우리의 삶을 둘러매고 있는 현실은 쉬운 평설에 비해
알게 모르게 구조주의적 매카니즘에 얼키설키 꼬여져 있음이다.
자연사가 사라졌다던가, 엉성한 미적 기준의 근거라든가.
예를 들어 34 24 35는 여성의 곡선을 감지해 내는 절대 수치이고,
막말로 말해 능욕하기 좋은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해 버려도
이미 남성적 사고의 영역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겐 편한 이해심이라 해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질 않은가
肉德은 美德의 반대 뜻인가? 미덕이나 육덕을 감싸고 있는 德은,
정념적인 덕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덕이라는 뜻의 배치인가?
덕이라는 글자의 구성은 사람 열 네 명이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덕이라는 개념은 '노자'의 말처럼 "있음 가운데 없음이요.
없음 가운데 있음"의 뜻이 되는가? 아니면,
사람 열 네 명이 모여서 가르침을 받거나 결정하는
모든 상황이면 '덕'이 되는 것인가? 물론 결과는 알 수 없음이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돌은 던져 봐야 길이와 목표를, 낙하 지점을 판단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172m의 높이에서 내가 살아온 지평의 영역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 본다.
빛 천지다. 어둠이 적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
自生으로 자라나지 않는 건물들과 결코 자생적이지 않은 길을 내려와
사람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마음에 품었던 사물들이 껍질 채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인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어차피 인위적이어야 함이
마음 속 깊이 박혀 있다. 문제다. 혹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산허리쯤에 바다가 눈 높이로 멈춰서 있었다.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놔주지 않던 늙은 소나무 가지들이
휘익 휙! 휘파람을 불어 댄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山頂을 돌아 봐야겠다.
빛에 노출되면 될 수록에 자신의 영역은 확실해지고
한 점으로 살아가는 動線의 실마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복잡한 複線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평에서의 나의 삶을 反芻(반추)해 보니
꽤나 많은 행적을 드러내며 내가 사는 곳.
이 곳 저 곳을 부지기수로 더듬어 다닌 것 같다.
山頂 높이 172m. 청량산을 올라가 보니 나의 삶이,
나의 행적들이 속속들이 들여다보인다.
서남쪽의 암벽을 통해 기어오르는 동안에
마음속으로 얕잡아 보았던 산정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수도 없이 올라 보았을 사람들의 대열에서
그 경험의 일부 됨을 자각해 보지만,
완만한 흥륜사 절의 범종 사이로 흐르는 산책로를
굳이 선택하지 않은 것은 깎아지르듯 가파른 암벽을
일직선으로 오르면 정상이 훨씬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의 시간이 빠르면 빠르게 지나갈 수록에 현실로 누적되는
겸허의 공기는 신선하고 달게 느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어둠이 익숙하질 않다.
하루 종일 곤두 서 있던 시신경들은
해방의 안식을 맞이하는 시간대가 돌아 오면
노곤해진 육신을 어둠 속으로 쳐 박아 대기 일쑤다.
혹은 육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본능이 더듬어 가는 사이에
肉德도 德이라고, 어둠이 내려 준 선물이라며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唾液(타액)을 이부자리에 적셔 놓기도 하였다.
어둠을 뚫고 스며 들어오는 가녀린 등불로 인하여 나의 물고기들은
오히려 자유롭게 筆墨의 바다를 유영하지 않았던가?
빛이 끄집어 놓은 사물이라는 걸,
억지 춘향 격으로 萬事如意라고 해석해 보았다.
혹은 一切唯心造라고 조심스럽게 정돈해 보았다.
정돈해 놓고 보니 자연적으로 구성된 것이 별로 없다
자연적이다라고 하는 개념이나 근대적이다라고 하는 개념은
서로를 확정적으로 규정하는 개념 정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우리가 사는 데에 과연 이러한 정리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곱씹어 보니 역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자연적인 것의 반대 개념은 필시 인위적인 것일 게고, 근대적인 개념 또한
전 근대적인 뜻으로 보면 사고의 多難性은 쉽게 풀이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우리의 삶을 둘러매고 있는 현실은 쉬운 평설에 비해
알게 모르게 구조주의적 매카니즘에 얼키설키 꼬여져 있음이다.
자연사가 사라졌다던가, 엉성한 미적 기준의 근거라든가.
예를 들어 34 24 35는 여성의 곡선을 감지해 내는 절대 수치이고,
막말로 말해 능욕하기 좋은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해 버려도
이미 남성적 사고의 영역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겐 편한 이해심이라 해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질 않은가
肉德은 美德의 반대 뜻인가? 미덕이나 육덕을 감싸고 있는 德은,
정념적인 덕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덕이라는 뜻의 배치인가?
덕이라는 글자의 구성은 사람 열 네 명이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덕이라는 개념은 '노자'의 말처럼 "있음 가운데 없음이요.
없음 가운데 있음"의 뜻이 되는가? 아니면,
사람 열 네 명이 모여서 가르침을 받거나 결정하는
모든 상황이면 '덕'이 되는 것인가? 물론 결과는 알 수 없음이다.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돌은 던져 봐야 길이와 목표를, 낙하 지점을 판단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172m의 높이에서 내가 살아온 지평의 영역 안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 본다.
빛 천지다. 어둠이 적다.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
自生으로 자라나지 않는 건물들과 결코 자생적이지 않은 길을 내려와
사람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마음에 품었던 사물들이 껍질 채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인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어차피 인위적이어야 함이
마음 속 깊이 박혀 있다. 문제다. 혹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산허리쯤에 바다가 눈 높이로 멈춰서 있었다.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놔주지 않던 늙은 소나무 가지들이
휘익 휙! 휘파람을 불어 댄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한번 山頂을 돌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