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대화

어느 가을 1. 2.

濟 雲 堂 2000. 10. 23. 00:06
어느 가을 1

샐비어 꽃잎을
하루종일 따먹고
집으로 돌아온 날은
석양과 함께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흙 범벅이 된 구두 한 켤레
장난 삼아 옷소매로 닦아드리면
용하게도 시리,
종이돈이 내 손에 쥐어진다

신흥 초등학교 담벼락에 매달려
하루종일 길게 땋은 플라타나스 그림자가
내 걸음 보다 앞서 닿을 무렵
긴담 모퉁이 길
또뽑기 장수 아주머니는
국자를 저은 젓가락을 빨고 계시겠지

우연히 다시 둘러보는 학교 앞 길
긴담 모퉁이 담벼락에는 각 설탕을 녹인 또뽑기처럼
황혼이 누릿하게 고이고
하얀 소다 가루가 뿌려지면
또뽑기 아주머니도 하얗게 늙으셔 있겠지


어느 가을 2

통금이 풀리고
거리로 쏟아지는 것은
고삐 풀린 시간들이었다
아직도 자정이 되면 환청으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와
귀가의 짐을 내리지 못해 뻘뻘 땀 흘리며 타야 했던 전철 시간표
파출소 간이 의자에 기대어 새벽을 맞아야 했던 나는,
앳된 국수의 미치광이처럼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다녔지
미안하다. 나이키 신발을 사 신었다고 기어다닐 정도로 맞은 어느 벗이여!
미안하다. 사내새끼가 파마했다고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며 빡빡 깎고 내게 무릎 꿇던 어느 벗이여!
미안하다. 영문으로든 일문으로든 앞가슴에 레이블을 달고 다닌 그 가슴팍에 닥치는 대로 주먹을 묻었던 어느 벗이여!
미안하다. 나의 알량한 사내다움에 귓볼에 침 뭍혀가며 사랑을 고백했던 어느 벗이여!
어느 벗은 내게 동굴 속의 랍비라고 했다.
1980년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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