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워싱턴 코리안 위클리 칼럼

시詩

濟 雲 堂 2016. 4. 6. 12:05


잡문이나 시를 원고지에 써서 우편으로 보내거나 직접 신문사에 제출했던 일들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30년이 흘렀다. 컴퓨터와 모바일을 통해 원고를 보내면 순식간에 처리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변화의 폭과 넓이를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하루 온종일 매달려 쓰는 것도 모자라 백열전등 아래서 꼬박 밤을 지세우기도 했던 것이, 짬날 때마다 입력과 수정이라는 손쉬운 명령어에 따라 저장해 놓기만 하면 언제든, 짜깁기 하듯 편집해 제출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결과를 놓고 봤을 때 과거와 현재와의 글쓰기 자체는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훨씬 수월하고 편리해진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글쓰기의 자세와 마음가짐에는 적잖은 혼돈이 서려, 글을 쓰는 건지 글자를 조합해 만드는 것인지 종종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시를 쓸 때는 더욱 그렇다. 원고지에 글자를 새겨 넣을 때마다 조심조심 각고를 남기게 되지만 컴퓨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물론이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전체의 내용들은 좋아진 반면, 깊이에 있어서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를 자주 받곤 한다.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시(詩)는, 말(言)의 사원(寺) 혹은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독특한 닉네임을 갖는 장르이다. 소설이나 수필이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쏟아내는 데에 비해, 간결 정숙 깊이 등의 여과장치가 시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압축된 언어와 문장을 우선시하는 이유로 소란스럽지 않고 말 수 적은 수도자에 견주어 말의 사원이라 이르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원은 복잡다난한 세상의 갓길에서 풍파노숙을 하는 구도자처럼 자신이 품은 도의 세계를 쫓는 상징으로서 존재해 왔다. 어쩌면 그 품을 통해 걸러져 나오는 말의 문학적 형상화가 시(詩)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현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정보의 획득과 전달과정이 이처럼 극대화 됐던 적이 없었다는 걸 목격하기 때문이다. 나날이 정점을 찍어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현대인들은 아예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응대해버리는 데에 익숙해져버렸다. 가슴으로 다가온 감정이나 살가운 정감을 기록하거나 발표하는 것을 불편해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쓰는 근대적 시대는 저물고 시의 원형질만 남은 채 스마트한 시대의 글쓰기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서 각투 중이다. 과연 그 속 언어(言)의 사원(寺)에서 시(詩)로서 살아남을지, 아니면 그림으로 남을지 그 향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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