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동해에 매료되어 여유 있을 때마다 강원도 행을 마다치 않았었다. 해아(海牙)에 씹힐 것 같은 긴장감과 트인 시야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에 있으면, 뭔가 그럴 듯한 시어(詩魚)를 낚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하였다. 낙섬과 월미도, 기껏해야 수문통에서 망둥이를 잡는 것이 소년의 즐거움이었다면, 수심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떠밀려온 진녹의 미역줄기와 드넓은 백사장에 남긴 족적의 쓸쓸함을 벗 삼는 게, 왠지 더 낭만적일 거라는 생각이 그 이후 시절이었다. 공교롭게 당시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시대 상황과 맞물려 흑백과 칼라로 대별돼 있었다. 어린 시절은 빛과 어둠이 빚어낸 찰흙 인형처럼 단촐한 느낌이 들고, 고등학교 이후 시절은 칼라지만 어딘가 어두운 톤의 색조가 전반에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년기의 기억은 죄다 낡은 흑백 다큐멘터리처럼 더빙 따로 피사체 따로인 채 엉성해 보이곤 하였다.
‘바닷가 소년’은 필자의 유년기 무렵에 발표한 한남철(한남규 1937~1993)의 자전적 소설의 제목이다.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에서 태어나 창영초 인천중 인천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잠시 수학한, 오롯이 인천의 젖을 물었고 인천을 주제로 작품을 써낸 인천사람이었다. 작가가 왕성하게 집필했던 시기에 신포동에서 배냇짓을 했다는 것 외에는 공간적 교집합이 이루어질 건수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나가는 소설 속 인천은 필자가 지닌 흑백 사진의 배경과 너무나 일치해 있었다. 인천이라는 중력을 거부하며 풍광을 쫓았고 어떻게 해서든 고향을 뜨려했던 약관의 시기에, 작가 한남철은 수도국산 홍예문 만국공원 옛 연안부두 신포동을 한편의 수묵화로 남겼다는 것은 필자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바닷가 소년’의 존재 가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82년 KBS TV문학관으로 방영되었고, 서독 베를린 세계 방송영화 경연대회(Prix Futura)에서도 특별상(1983년 4월 22일. 경향)을 수상했다는 것으로 그 무게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길 위의 인문학’이란 주제로 강의와 답사를 진행하는 중에, ‘바닷가 소년’의 전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인천 개항장 일대가 놀이터였고 생활이었던 공간성에 문학적 체험과 역사가 보태지면서 학습의 완성도는 더 높아지게 되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과 그 선배 세대들이, 난세와 가난을 품어 낳은 ‘바닷가 소년’들의 눈빛은 이내 별이 되었다. 문학에 관심을 갖고 인천에서 태어난 작품의 배경지를 둘러보던 시민들은, 퀴퀴하게 묵은 지난 시절 사진첩을 보듬듯 답사의 족적을 유심히 되살펴보기도 하였다. 과거는 덮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어 닦고 어루만지는 가운데 그 가치가 도드라지는 것처럼,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인문학을 길 위에서 낚는 것은, 인천이 낳고 키운 작금의 ‘바닷가 소년’들만의 특별한 혜택이 아닐까 싶다. 인천은 근대문학을 비롯해 현대를 아우르는 빼어난 작품들이 많이 배출된 공간이다. 현덕의 ‘남생이’ 강경애의 ‘인간문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최인훈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그리고 근자에 조혁신의 ‘삼류가 간다’ 등이 그 맥을 잇고 있다. 가난과 난세의 상황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어디 세상에 어둠만 있겠는가. 차세대 ‘바닷가 소년’들이 바라보는 먼별에서 불꽃이 펴오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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