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냉담자의 또 다른 시선

濟 雲 堂 2014. 8. 13. 21:37

 1980년 겨울, 선배는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툭 내던져주고는 급히 나가버렸다. 당시 답동성당 사무실과 좁은 길을 사이에 둔 사제관 1층에는 20여 석을 갖춘 독서실이 마련돼 있었다. 통행금지가 얼마 안 남아 서둘러 집에 가야한다는 다급했던 말은 문지방에 한 뼘 정도 걸쳐져 있었다. 책을 펼쳤으나 읽히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읽을 수 없었다. 나랏말인데도 생소한 단어, 어려운 문장, 낯선 내용들로 꽉 찼던 책은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삐리에게 두꺼운 벽을 맨손으로 두드리는 것과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복사를 섰던 처지였고 현재까지, 각종 모임에서 만나면 단골 메뉴처럼 그 때의 추억을 곱씹던 선배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의 첫 대면에는 그런 사연이 담겨 있었다. 한 매듭 씩 풀어가는 재미, 젊은 가슴으로 쓸고 닦는 면벽의 세상은 그렇게 얇아져 갔다. 그때 열공의 시기를 거치며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희랍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명제를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 끼얹듯, 유르겐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구스타보 구띠에레스의 ‘해방신학’은 미친 운전자의 운전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했다. 장황스럽게 이야기를 끄집어낸 데에는 해방신학의 발원대륙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의미가 여러모로 필자와 인천 천주교회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3.1 만세운동에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며, 일장기를 교회에 게시하고, 당시 신사였던 인천여상에서 참배를 독려하는 것 등을 제외하면, 그 역사적 상징성과 사회적 책무는 나무랄 데 없는 존재감이었다. 특히 1980년 전후의 활약상은 암울한 시대상의 방향타였고 흔들림 없는 중심이 분명했다.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의결 이후부터 사제가 비로소 신자 얼굴과 맞대고 미사를 봤다고 하면 놀랠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더욱이 성당의 왼편은 여성이 오른편은 남성의 좌석이었으며, 그 이전엔 제대를 중심으로 장막을 가리고 미사를 집전했다고 하면 요즘 말로 ‘멍’때리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답동성당의 비약적 발전은 한국천주교회와 궤를 같이 하며 시대의 변화를 함께해 안정적 세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무가 크면 클수록 그 그늘 또한 넓어지는 법, 여전히 총체적 문제의 핵심에서 빗겨간 소소한 일들이 양버즘나무 껍질처럼 떨구어도 사라지지 않는 건 ‘사람’이 그 중심에 있어서가 아닐까.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조망이 가능하다. 특히 ‘행복 10계명’이라 칭하며 세계인에게 제시한 바를 유심히 살펴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비범함이 반성이란 평범 속에 있던 거였다.

 

냉담은 ‘태도가 차갑고 무관심’하다는 뜻으로 천주교에서는 판공성사를 연거푸 거른 사람을 칭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심의 부족으로 안 본다는 단서가 고맙게도 첨부돼 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할 사회가 경제적 불균형, 물신풍조, 철학의 부재, 문화적 삶의 몰이해, 전근대적 지도자를 우상시하는 가운데 또 다른 냉담자를 양산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삶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보지 않는 단서가 여전히 첨부된 채 말이다. 따라서 냉담자는 없다. 다만 냉담할 뿐이다. 이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누가 끊을 것인가. 악순환도 순환의 일부인가. 냉담의 사슬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벽안의 어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박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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