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역 앞 광장을 떠올리면, 늘어진 수양버들 몇 그루와 연못인지 괸 물인지 그 주변에 뺑그르 둘러앉아 가난한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는 허름한 노인들이 보이고 있다. 이따금 종중(벽진)의 가마터에서 보낸 옹기가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을라치면, 어머니를 제외한 남정네 일곱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달구지에 항아리를 실으러 갔던 기억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역사 오른 편,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물역을 빠져나온 달구지를 발치에서 쫓아가며 소리치는 것은 당연히 필자의 몫이었다. 새끼를 꼬아 제아무리 단단히 동여 맺다한들, 덜컹거리는 오르막길은 항아리의 존재감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용동 마루턱을 넘어서 옛 내리교회 정문 옆 석정 이후선 저택자리에 한 차례, 현재 가톨릭회관이 들어서기 전 공터에 또 한 차례, 인천여상 옛 정문 건너편 창고에 끝자락들을 내려놓으면 지루했던 감독의 역할도 끝이 났다. 방앗간을 지키던 어머니는 한 솥 쪄놓은 꽃게를 내놓으며 수고한 형님들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으로 홍역 같던 하역을 마쳤던 기억이 있다.
존재했던 것의 부재는 상실, 그 이상의 피폐함을 낳는다는 말에 적극 동의하고 있다. 부모님과 두 분의 형님마저 여읜 참에 이력의 조각들은 무사한지, 그 때 그 기억이 바른지 되새김할 처지가 되다보니 시니컬하게 존재하는 무형의 동인천 광장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개개의 주체와 장소를 담아내는 큰 그릇으로, 때로는 무용의 공간, 소일거리와 일거리의 경계에서 생활고를 숨긴 채 길게 늘어선 지게와 달구지의 행렬은 동인천 광장의 또 다른 오라(Aura)였던 것이다. 체코의 ‘체스키 부데요비치’ 광장은 유년의 동인천 광장과 꽤나 닮아 있었다. 답동성당에서 울리던 종소리를 연상하듯 ‘잔 발레리안 지르직’을 기념한 종탑에서 시간들이로 쳐대는 종소리는 광장을 바쁘게 때로는 한가롭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약속장소로, 거리 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중세의 건물들을 호텔과 책방, 카페 등으로 변신케 한 것이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가는 차량에서 게워낸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은 광장의 중심에서 마을의 전설을 뿜어내는 조형미 넘치는 분수대였다.
인천은 광장이 부재한 도시이다. 설령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대를 잇는 추억과 지역의 배꼽이야기조차 담기지 않은 상징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아엎을 수 있는 무대 같은 조경만 있을 뿐이었다. 최인훈의 ‘광장’도 상업주의의 민낯인 건강하고 소박한 길거리 음식도 열정과 낭만이 깃든 책 읽기도, 가슴을 후비며 파고드는 절절한 자유도 없는 인공의 오아시스일 따름이었다. 동인천 광장에 홀쭉한 시계탑이 들어서고 천막을 두른 광고탑이 거만하게 우쭐댈 무렵, 새로운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광장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비엔나 슈테판 광장은 말똥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망각의 빗장이 열리자, 쓰레기와 짐을 가득 실은 채 똥자루에 쏟아내던 동인천 광장의 나귀와 소의 분비물이 연상되었다. 지난 세기에 사라진 우리시대의 잔유물을 코 틀어막으며 맡는 묘한 감정 너머로, 무언가가 신기루처럼 펴오르고 있었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있어도 부재한 그 공간에 담겨 있거나, 담아야할 영혼의 자산이 우리 도시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실, 그 이상의 피폐를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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