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風, 곧이어 風 또는 뻥
-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을 생각한다. -
책은 인류 문명의 허리춤에 늘 무기와 함께 있었다. 이 살벌한 공생관계는 무자비한 권력의 집행을 정당화하거나, 논리 안에 내재된 폭력성이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는 협박이 점잖게 포장돼 있다. 기원전 288년경 문을 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현대 도서관의 효시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정복자 알렉산더의 부관이자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수집욕을 채워줬다는 단서가 불량스럽게 붙어 다니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식으로 좌책우도(左冊右刀)라 이르고 싶은, 7세기 중엽부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일부를 강타했던 사라센 제국이 정복의 이유로 삼았던 ‘한 손에 칼, 다른 한 손엔 꾸란’처럼 7백여 년 동안 정복자의 외투는 주변국 인민을 암울하게 만들었던 ‘꾸란의 추억’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의 단편적 이면사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역사의 기록을 전달하고 무지로부터 깨어난 삶의 추구를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책의 뱃구레에 폭력과 폭압이 살모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인류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책은 나를 만들지만 너를 만들기도 하고 우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너의 나, 나의 너, 나 같은 너, 너 같은 나를 만들기 위해 문자라는 독특한 소통 방식을 이용해 한 묶음으로 엮어내려 하는 교사역이 바로 책의 또 다른 본질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권 유지에 위협적이었던 책들은 과감히 족쇄를 채우고 분서를 감행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책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이다. 소설 장르의 효시이자 새로운 정치관을 피력해 교수형을 당한 후 ‘금서’로 지정됐지만, 수백 년이 흐른 2000년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는 역설의 대명사가 <유토피아>인 것이다. 이는, 과거 군부독재정권 하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책들이 철갑사슬에 묶여 있던 우리의 현실과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문민정부 이후 햇빛을 보긴 했지만 그 것도 잠시일 뿐. ‘금서’의 해제는 그저 역사의 보상 정도이고 더 이상 우리 사회는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아니, 설화만 남을 뿐이었다. 태양(권력)을 머금고 기록된 말은 ‘역사’가 되고 달빛(희생)을 받아 쓴 글은 ‘설화’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현재의 태양 빛은 인터넷의 다리를 넘어 개인휴대폰 즉, 스마트 폰 하나 씩 허리에 장착한 온전한 개인에게 그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으니, 너의 책과 나의 책 과연 우리에게 책이 필요하긴 한 것인지 의문투성인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1995년 유네스코 주관으로 책의 수도를 지정하자는 논의를 시작점으로, 2001년 스페인 마드리드가 지정되면서 그 처음을 공표하게 된다. 이후 십이 년을 거쳐 방콕, 나이지리아의 포트하커트 다음으로 인천이 선정되기에 이른다. 세계의 책과 저작권의 날을 기념해 한 나라의 한 도시를 한 해의 수도로 정한다는 퍼포먼스는, 작가를 비롯해 자본주의 생산 구조에 운명적으로 얽혀 있는 종사자들과 정치가에게 없어선 안 될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 특히, 한 달 평균 0.7권도 읽지 않는 인천시민의 책읽기 수준으로 보아 반등 및 소폭 상승조차 불가지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책의 수도로서 인천의 선정 의미가 더 특별나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 것도 불안하게. 어쨌든 책의 수도로 지정된 만큼 그 효과는 톡톡히 봐야 직성이 풀릴 자치정부로서는 이만 저만 고충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예측되고 있다.
스마트 폰의 위력과 그 능력 앞에 모두 머리 숙여 삼배구곡 하고 있는 현재의 현상을 뒤엎을 만한 초강력 인자는 부재하다. 전철에서 버스에서 하물며 걸어 다니면서까지 스마트 폰에 집중해 있는 이 상황을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혓바닥을 튕기며 침마저 흘리는 사람의 대화가 사라졌고 손가락 마디에 침 묻히며 책장을 넘기는 장면은 너댓살 코흘리개를 통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친구와 만나도 대화는 없고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씩 상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서너 시간 죽 때리는 스마트폰 데이트.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것이 화면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보다 열 배 가량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학자들의 통계는 그저 수치상의 정보가 되고 만다. 우리 사회의 0.7권과 일본인의 한 달 독서량 4권, 유럽의 4권반은 분명 다른 수치이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라고 할 정도면 굳이 목을 빼듯 안달해야할 마땅한 큰 이유가 우리사회에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예로 들면, 책을 너무 집중적으로 읽어대 신체허약, 뇌신경쇠약, 만성두통에 허덕이게 하니 책을 읽혀서는 안 된다는 존 로크의 주장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올 판이다.
2015년 세계 책의 수도로 인천이 지정됐다. 책 읽지 않는 무풍의 영혼에 광풍이 불기를 소망하지만, 습관과 미숙한 휴식 그리고 정보의 일천함에도 무게를 두지 않는 인천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지 미지수이다. 아니 관심 밖이다. 아쉽지 않고,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 정부와 시민이 불통하는 한 인천은 껍데기 도시, 21세기의 대표적 무혼의 도시로 전락할 것이 명약관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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