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자료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인천 차이나타운

濟 雲 堂 2009. 12. 16. 01:12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인천 차이나타운


                                이종복. 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개항장 역사문화연구소 대표

                                        인천 작가회의 이사(시)



들어가는 말.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인천 차이나타운과의 관련성은 포괄적 의미에서 개연성은 존재하나, 인천 차이나타운을 한국적 다문화주의의 일부 차원으로서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다문화주의 개념은 1970년 대 후반 북미 사회학 전공자들에 의해 도입됨에 따른, 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성과 시대성을 관련짓기 어렵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1884년 공식적으로 인천에 정착하기 시작한 중국인 1세대들의 정착 목적과 계층의 분포에 따른 정치 경제적 목적 등이 현재의 다문화주의의 개념 정립에 이질적 대입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여러 방면의 실증 현장들과 학술적 업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재의 상황에서 다문화주의에 관한 필자의 일체부언들은 적절한 내용이 아님을 우선 밝히고자 한다. 다만, 기존에 존재했던 다원적 문화 형태로써의 인천을 설명함으로서 근대역사의 이해와 더불어 오늘의 현장성에 초점을 맞춰 상호 관련성을 도모할 수 있도록 실증적 차원에서 인천과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인천의 청국상인


 인천에 중국인들이 정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4년 <仁川口華商地界章程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을 체결한 이후부터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1883년 <仁川口日本租界約書 인천구일본조계약서>를 체결함으로써 응봉산(현 자유공원) 남록부터 그 일부 해안까지 ‘조계’를 설정해 영사관을 짓고 거주하고 있었다. 청국조계는 응봉산 서쪽 기슭부터 현재의 인천역 일대를 아우르는 8,300여 평의 구릉지대를 토대로 영사관(현 중산학교)과 각종 상업 및 주거 시설 등으로 조계지를 형성하였다. 초기에 관헌과 민간 무역상, 농부들로 구성된 72 명이 청국조계지에 거주하였으나, 1888년 상해와 인천 간 정기여객선(상해의 상업기선 ‘주株’)이 취항함에 따라 1890년 967명으로 급증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의 여파로 대부분이 귀국해 청관일대는 200여 명 남짓한 중국인들이 남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하간 1892년 공식적인 청관(인천 차이나타운 영사관) 자료에 의하면 조계지 내의 총 인구는 521명으로 관리 47명, 상인 100명, 농부 22명, 직공 371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개항 초기에 인천과 중국을 주요무대로 무역업을 행하였던 청인들의 대다수는 산동성 출신들이었다. 영래성, 덕순복, 쌍성태, 공순흥 등 거상들로서 동북아 신흥 경제 강국으로 도약을 꿈꾸던 일본 상인들에 필적할 만큼 규모가 매우 컸다. 반면 1900년을 전후로 상해를 중심으로 한 광동성 출신의 상인들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 이 무렵 청국상인들의 무역규모가 일본상인을 앞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늑약 등의 사건 발발로 국내에서의 정치 경제적 입지가 축소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상업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청국상인들의 꾸준한 증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개항초기부터 1931년 까지 인천의 거류민(정주)수를 참고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년도  /   구분

    한국인

   청국인

    일본인

    구미인

     1890

    8,943

    1,331

    3,949

    57

     1902

    9,803

    965

    5,136

    75

     1907

    14,362

    1,373

    11,467

    63

     1911

    15,978

    1,505

    15,148

    70

     1917

    19,266

    1,262

    11,725

    39

     1922

    28,782

    1,786

    11,099

    25

     1927

    40,085

    2,077

    11,671

    32

     1931

    51,005

    1,469

    11,373

    34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 1979년 84쪽>

 


한편, 인구 대비에 따른 꾸준한 증가세를 보인 청인들은 더욱 다양하게 계층이 나뉘어졌는데, 1930년 기준 인천 지역의 청인 가운데 물품 판매업자(무역)는 602명, 행상 및 노점상 76명, 여관 및 요리업자 257명, 이발 및 미용업자 55명, 농업 및 기타 130명으로 다양하게 기록돼 있다. 이들의 소득 수입을 시기 별로 간략하게 대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년도   /     구분

       총액

     청국상인

    일본상인

     1885

    969,440

      242,680

    726,760

     1888

    1,685,578

      636,092

    1,049,486

     1892

    3,039,819

      1,716,231

    1,323,588

                <19세기말 조선에서의 청상활동 연구. 이흥권. 강원대 석론 발췌 22쪽 2006>



인천이 자장면의 고향이라고?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시발은 근대문물의 유입과정 시기로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정식 통관 절차에 준해 해관(세관)이 설치되고 관세 및 무역 협정 등의 정상 운영을 감안할 때 전제되는 조건이다. 인천에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주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1882년 임오군란의 평정 요청에 따른 서울 주둔의 파장에 불과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 병력 위주였고 실제적으로 영사관 업무와 함께 민간 무역업자들이 정착하게된 것은 1884년이 그 최초가 된다. 이후 1887년 부산과 원산에 각각 청국조계를 설치함에 따라 소수의 청국인들이 거주하게 되는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천은 고대 비류백제(372년부터) 시기부터 약 100여 년간 중국(동진)의 항주와 등주 항로를 잇는 요지(능허대)였고, 신라 시대 때는 당나라(당진, 소래 지명 유래. 그러나 정확치 않음)와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와 통교에 있어 해로(서긍의 ‘고려도경’ 참조)를 제공했던 공간이었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는 곳임이 증명된 공간이었다. 특히 국지적으로는 산동성과 오래된 체험과정을 통한 해류의 방향성에 따른 빠른 경로(영종도->덕적도->홍도->등주) 등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인천의 역사성을 거론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증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근대시대 인천을 시원으로 하는 자장면의 탄생은 인천이 역사적으로 친숙한 지리적 조건과 맞물려 조수간만의 격차에 따른 자연발생적 식문화의 산물이었다. 대거 유입된 청국인 노동자(통칭해서 고력苦力, 또는 쿨리coolie)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뱃짐을 부리는 과정에서 이들의 식사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중국의 춘장과 면을 섞어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이설이 많음). 불에 익힌 채소류와 고기, 따로 끓이거나 볶은 춘장을 한데 섞어 되직하게 만든 자장을 면 위에 뿌려 먹는 것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자장면의 모습이다. 필자가 실제적으로 중국 식문화 자료와 음식을 체험하면서 얻은 것은, 우리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은 비빔밥과 전혀 다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전역에서 콩과 보리를 이용해 만든 춘장을 면이나 밥에 얹혀 먹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일반인들의 식문화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이 세계 유일무이한 자장면의 고향 운운하는 것은 잘못 자리 잡은 편견일 수 있는 것이다. 현지의 특성과 입맛에 따른 변화를 새롭게 정착시킨 중국인들의 지혜로운 발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해야함은 마땅하나, 자장면을 통해 지역 이기주의로 전환, 고수하려는 억지 발상은 깊은 고려의 대상이 된다. 문화의 정체성 이해는 바다와 같은 큰물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 가에 대한 성찰이다. 각기 다른 원천에서 출발한 지류들이 실개천을 만들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모여들게 하는 힘이 문화를 일구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정체성을 운운하기 전에


 1995년 지자체가 시행되고부터 지방정부의 행정력과 경제적 독립구조에 대한 고민은 지역과 규모의 편차를 막론하고 어느 곳이든 겪어야할 문제로 대두 되었다. IMF를 겪으면서 한국 경제의 총체적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대안으로 외국인 노동력이 유입되었고 중앙정부의 세계화 사이클 진입을 위해서는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세계적인 것이 지역적인 것이다”라는 동기부여 제시와 함께 ‘문화의 세기’를 강조하는 일련의 정책들이 장려되었다. 이 두 가지 화두는 그동안 변방의 도시 군에 속해 있으면서 지자체의 경제적 독립성을 강조하던 지방정부에겐 해법임(Solution)과 동시에 틈새시장개척(Blue Ocean)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이었다. 기존의 정책 기획적 시장(Red Ocean)이 제로 섬(Zero sum) 경제구조의 형질이었다면 새로운 해법의 창출은 다양성, 복합성, 총체성이 전천후로 추진되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유전인자가 필요로 했던 상황이었다. 의도적인 것에는 의당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변증법적 변화과정을 긍정적 시각에서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섞어짐의 화학적 변이를 철학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도의 사회성이 이미 우리사회에 깊이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중략에 대한 열쇠 말: 독재정권, 1980년대, 1986년 시민운동, 1990년 소련의 해체, 여행자유화 조치, IMF>

 2000년, 인천 차이나타운은 문광부의 ‘월미관광특구’ 내에 문화지구로 설정됨에 따라 음울함 일색이었던 과거와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거 외형이 바뀌고 화교에 대한 정책이 완화되는 등의 일단의 조치에 힘입어 부산, 대구, 서울, 안산에 새롭게 조성된 이국적 풍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2005년 지자체의 영주 주민 20세 이상의 화교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에 따라 그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지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현재 인천차이나 타운 일대(중구 전역)에는 170여 가구 500여 명의 화교와 중국에서 유입된 다수(등록인 수 불가지적임)의 중국인들이 식당 허드렛일과 무역업 및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중략에 대한 열쇠 말: 1961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1963년 화폐개혁, 1973년 중국음식점에서 쌀밥 판매 불허, 일 가구 일 주택>

  

맺는 말


 인천에 중국인이 살기 시작한 지 어언 한 세기를 더해 사반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중국 및 대만 국적 중국인들의 총칭인 화교의 역사는 명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역사는 깊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고향을 떠났음에도 언어와 문화를 영속한다는 점이다. 언어와 문화를 공통분모로 삼고 현지화에 철저히 기했다는 점은 오늘날 화교를 사회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동질감과 이질감의 벽을 낮춰가는 삶의 지혜 또한 한국사회가 적용해야할 과제임에 틀림없는 이유는, 국내에 증가하는 외국인에 대한 수용적 가치가 이미 우리사회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개별적 인자들의 복합적 구축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바다를 이룬다고 앞서 거론했다. 우리나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해와 진로는 대해로 가기 위한 샛강을 겨우 건넜다는 인식이 수용돼야할 즈음이다. 과거 우리의 이민 역사를 반추해 보면 현재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삶에 대한 행복추구의 권리는 모든 인류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인천 차이나타운과 관련된 역사 문화적 이해를 통해, 더디게 다가온 다원적 문화주의의 다문화주의적 해결 방식에 작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졸고를 갈음한다.



참고했던 자료들


<한국개항기 도시 변화 과정연구: 개항장 ,개시장, 조계, 거류지> 손정목. 일지사. 1982

<인천부사> 인천부청. 1933년

<개항과 양관역정(영인본)> 최성연. 해반문화사랑회. 1999년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 인천상공회의소. 1979년

<한국화교의 경제활동 및 사회적 지위에 관한 연구> 인천발전연구원. 2003년

<19세기말 조선에서의 청상활동 연구> 이흥권. 강원대 석론. 2006년

<인천 한 세기> 신태범. 홍성사. 1983년

<총독부 기록물(1910):재한 청국 거류지 설정> 국기기록원.

<기전문화연구 20호:인천항의 조계에 대하여> 박광성. 인천교육대학 1991년

<인천 선린동 공화춘: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한양대 한동수 교수(주)2007년


* 도표 아래 기록한 참고 자료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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