舌 .썰. 說

십정동, 달콤 쌉쌀한 몇 줌의 역사 레시피

濟 雲 堂 2009. 11. 18. 20:57


이십일 세기형 문화 도가니

  이십일 세기의 눈으로 보는 십정동은 뜨악하기 짝이 없다. 지난 세기에 세워진 일체의 도시 경관들이 허접스러움의 그림자를 여전히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난 세기의 시선에 저장된 일체의 축적된 현실들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게 훨씬 겸손한 대답이다. 이러한 대답의 뿌리는 적어도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며 인천적 삶을 고민해 왔던 도시민의 입장을 대변해서 하는 말인데, 지역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인천 시민들의 명예와 삶의 질적 진화를 끊임없이 도모해온 역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두의 명제는 응대할 가치조차 없는 헛똑똑이들의 수사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정동, 이십일 세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십정동은 미래의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시대의 대안공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히 못 박아야 할 것이다.

 최근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난 도시>라는 책을 펴낸 재불 건축학자이자 도시 계획 전문가인 떼오도르 폴 킴의 주장은 고군분투하는 문화운동가들에게 단비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의 ‘도시는 물질만 존재하고 문화는 없다’는 것이다. 문화 운동을 한답시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문제점에 주눅 들어있는 외로운 활동가들과 도시 서민들에게 경구와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역으로 문화를 거들먹거리며 공권력을 휘두르는 지방행정부의 무지한 행정집행에 이미 설레발 쳤던 경험들이 우리에게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실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천시 동구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를 위시해서 배다리, 가정오거리, 동인천역 광장 등은 이미 도시개발의 홍역을 치렀거나 그 와중에 있는 곳들로써 진행과정의 오류와 공권력의 무지함 나아가 문화 인식의 부재를 바탕에 깔고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재개발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하나를 챙겼다는 위안이 지난 세월을 보상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도 사려 깊게 우리 사회를 통찰할 여지로 남겨두는 게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십정동이 十井洞이라구?

 지역의 명칭은 지역적 특색과 지리적 환경 또는 역사적 사건에 따라 지어지는데, 붙여진 명칭은 쉽사리 고치기 어려워 한번 부르기 시작했다하면 그대로 고착어가 되어 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십정동은 옛 인천 도호부 주안면 상.하십정리를 이르는 지역의 명칭으로 사용했었다. 사실적 관계 측면에서 진짜로 열 개의 우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없지만 그러한 우물이 존재했었다는 가정 하에 몇 가지 추론을 덧붙이자면 아주 재밌는 역사의 현장들이 십정동의 뿌리 깊은 역사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여지도>와 <동국지도>를 면밀히 보면 십정동 일대는 갯고랑이 깊이 포진돼 있거나 한남정맥이 관통하는 남쪽 주변부의 평지로 그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십정동 일대는 고로古老들의 말마따나 부평을 향하는 원통이 고개 일대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주할만한 땅으로써 적합지 않았다는 얘기인즉, 현재의 십정동 도축장에 이르는 길까지 갯물이 흘러들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다. 드문드문 민가 몇 채가 소금을 캐고 농사를 짓는 것 외에는 그야말로 한적했던 지역에 사람의 체온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제2차 인천 부역확장에 따라 인천부로 편입되고부터였다고 한다. 대조정大鳥町이라 붙여진 이름 한 켠에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설움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것을 비로소 떼어낸 것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일이었다. 또 하나의 일설은 현재 상정초등학교 위에 큰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은 사시사철 얼지 않을 만큼 열熱이 난다해서 붙여져 열우물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와전돼 십정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님비현상에 따라 이전한 십정동 도축장?

 십정동에 도축장이 생기기 이전에 인천 지역에서 유일하게 도축시설을 갖춰 놓고 도살 작업을 했던 곳은 배다리를 넘어 우각리(금창동) 고갯마루 아랫길에 위치해 있던 인천 도축장이 유일했었다. 현재 동구청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리인데 1916년에 개설돼 동구청이 들어서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 도축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늘어나는 인구와 도시의 확대 그리고 교통의 발전에 따라 인천의 시세는 급속도로 확장하게 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 중반부터 기치를 올렸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책’에 따른 경인공업지대의 활황은 철도부설 역세권들을 중심으로 공업, 주거, 교육, 상업 시설들이 들어서는 조건이 되었다. 인천 도축장은 이러한 시세 변화에 따라 본의 아니게 주거지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고 시 행정부의 이전 계획에 의해 십정동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는 변통을 겪었던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발간된 1933년판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 도축장은 1916년 9월 6일에 허가를 시작으로 부지 평수 689평, 건물 평수 99평, 직원으로서는 부서기 1명, 도살부 3명을 두었고 소 돼지 말 양 개 등 가운데 소와 돼지를 중심으로 연 평균 6천 여 마리를 도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십정동에 있는 도축장의 변화의 원형질은 인천 구도심인 동구에서 출발해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는 점은 오래 두고 기억될 이 시대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전설 따라 삼천리

 앞서 십정동의 지리적 특성을 이야기할 때, 십정동 인근까지 갯고랑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고로古老들의 말을 전거에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십정동 바깥지역인 가좌동 삼거리와 시립 인천의료원 앞을 지날 때마다 비릿한 갯내가 물씬 솟는 느낌이 일고 있다. 예의 그렇듯이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은 없다는 말이 적중의 묘를 살리고 있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인천의료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천교라는 다리를 통해서 삼익 악기 방면을 지나 가좌, 가정, 부평으로 넘어가는 삼거리를 통과해야 했다. 소년의 기억 속에 흐르는 ‘개 건너’라는 지명이 살갑게 들리는 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지금은 어느덧 생소한 이름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장난 반 놀이 반으로 율도로 수정을 캐러 다니곤 했었다. 그 때에 필히 거쳐야할 곳이 ‘인천교’ 즉, 개 건너였다. 다리 밑으로는 교차해 흐르는 먹 빛 바닷물과 인기척 없이 횅댕그렁하게 놓여있는 목선들이 젖은 몸을 말리는 듯 볕을 보면서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리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순경과 헌병 군인이 판자때기로 만들어 놓은 초소에 앉아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풍경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던 찰라가 정지화면처럼 각인돼 있기도 했다. 황해의 누런 혈류는 마지막까지 당도하던 곳을 십정동 도축장 길 건너 이름을 알 수 없는 낮은 산자락, 보신탕 가게들이 즐비한 초입까지 이르고 있었던 데에는 무슨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된장을 풀어 끓인 구수한 장국에 마늘이며 생강을 듬뿍 넣고 들깨를 갈아 소복이 뿌려 얹은 지난 시대 먹을거리의 대명사가 냉소를 받고 있는 요즘, 개들도 상장예절에 맞춰 장례를 치르고 조문을 받아 사람처럼 화장을 해 납골당에 모시는 세태와의 연관성은 인본주의 시각의 확대 개념으로 해석해 견본주의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일까? 아무튼 범 생명의 인간 자기화의 주장이 미물에게도 적용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기와 미래 세계와의 충돌은 모든 면에서 불가피해졌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원통이 고개는 황해지류의 손끝을 벗어난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원통하다의 사전적 설명을 굳이 원망과 통한의 감정이라고 못 박듯이 단숨에 내질러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와 더불어 수도를 정하기 위해 이 일대를 둘러보고 도읍지로서 적확하다는 판단 하에 머물렀다가 이튿날, 봉우리 하나가 사라지고 아흔아홉 개 밖에 없는 만월산 주변 한남정맥 산세를 보고 도읍으로 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원통이 고개의 또 하나의 역사적 양념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시대의 무신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수로를 개척하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는 사연이 그 두 번째 역사의 양념이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합리적이고 수긍이 가는 역사적 레시피는 아무래도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김안로가 주장했던 대목이 아닐까 싶다.

 예로부터 삼남지방에서 거둬들이는 지방의 세곡을 안전하게 수도로 옮기는 일은 지방 관리와 세리들의 가장 큰 난고의 문제였다. 인천의 해안을 따라 월미도 앞 작약도를 거슬러 순항하듯 올라가면 문제가 없을 터이지만, 조수간만의 차를 제대로 계산해 올리지 못했을 시에는 영락없이 배가 역류해 가라앉거나 침수되는 난리를 어지간히도 겪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물때를 잘 맞췄더라도 강화를 거슬러 마포로 향하는 길목 초입에 ‘손돌목’이라는 무시무시한 수괴가 버티고 있을 양이면 여간 숙련되지 않고서는 지방세곡들을 물에 적셔 삭혀지고 마는 불상사를 부지기수로 겪었을 것이다. 이에 한강물을 끌어들이고 황해 누른 물을 끌어내 서로 끈 엮듯이 엮어내면, 보다 안전하게 수도 한양으로 옮겨질 것이 아니겠느냐는 발상이 굴포천을 잇는 사업이 되었다. 번번이 깨지고 마는 사업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끝내는 이을 수 없었던 굴포천 관통의 꿈이 원통하다해서 원통이 고개는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여하 간에 암반 투성이 한남정맥의 지류를 가르지 못한 채 역사를 가웃하는 동안, 만석동이란 이름이 생겨났고 굴포천 관통의 비운이 또 인천역사의 그릇에 올려지고 원통이 고개와 그 끝 말미에 십정동이 생겨났던 것이다.


맛깔스런 짬뽕의 도시를 위한 마지막 레시피

 1970년을 전후로 해서 십정동 일대는 일대의 부흥기를 맞는다. 경인공업단지 조성에 따른 정책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노동력들을 수용하는 데서부터 주거지가 발달하게 되고 공장들이 몰리게 되고 급기야 기차역마저 개설되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한 평생의 경제적 설움을 극복하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위해서 어렵사리 둥지를 튼 세대들의 단호함이 깃든 공간의 탄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늙고 힘마저 빠져버린 세대들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겠다는 염려처럼 낡은 건물들과 오래되어 그 기능이 저하된 도로들을 보면 저절로 한탄이 우러나올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이며 저돌적이고 고압적인 개발 논리를 지닌 지방정부의 ‘한 침대 두 마음’ 같은 행정 방식은, 막강한 화력을 지닌 대중매체들이 전하는 선진화된 조감도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주민들은 심정적으로 선진화된 삶의 구조와 수준을 체득해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답을 숙성시켜왔던 것이다. 떼오도르 폴 킴의 말마따나 우리의 도시는 물질적인 삶이 문화의 질을 수용할 수 없을 지경으로 허술한 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주의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값진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굴포천 운하 계획과 4대 강 개발 사업 그리고 각종 재개발의 깃발을 들어 올린 전국적 개발의 메뉴판에는 여전히 진실성과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의 확대, 앞으로 우리의 자손들에게 건강한 삶과 영혼이 깃든 미래를 담보해 꼭 넣어주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십정동은 그러한 중심에서 재평가 받아야 할 당면성이 존재한다. 온통 시멘트로 포장된 도심의 흉곽에 꽃을 꽂아야 하고 ‘개콘’이 주는 무한정 웃음을 선사해 살만한 공간임을 온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동암역 북 광장은 쌀쌀한 겨울바람도 쉬어 간다는데, 다문화와 그림자들은 여전히 춥고 외로운 채 길게 늘어진 육신을 말아 올리는데 여념이 없고 철부지 행인들이 드러내 놓은 짧은 치마는 자본주의의 상흔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위해 따끈한 짬뽕 국물을 건 낼 것인가.   

'舌 .썰. 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계단  (0) 2010.06.08
고백(告白)  (0) 2010.03.14
우림雨林에서  (0) 2009.07.18
기생과 생존  (0) 2009.04.24
25분  (0) 200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