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역 북 광장에서, 노래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을 법한 ‘카수’ 한 사람을 보았다. 종량제 쓰레기 더미가 마치 무대처럼 놓인 게 안쓰럽긴 했지만, 그로 인해 불편해 하거나 코를 틀어쥐고 광장을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봄볕이 따갑다는 게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쓴 늙수그레한 카수는 헐거워진 입술로 연실 노래를 털어내고 있었다. 입술로 노래 부른다는 걸 의아해 할 독자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수와 달리 가수는 이빨로 제 가슴 속 잘 영근 허파꽈리들을 잘근잘근 씹어 뱉어내는 사람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수가 아니라 카수라 했던 점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 늙다리 카수는 인파에 휩쓸리지도 않았을 뿐 더러, 억센 조선족 말과 다국적 언어들이 말풍선으로 떠다니는 광장 한 구석에서 발기된 노새처럼 꼿꼿이 서서 노래 부르고 있었다. 동암역 북 광장은, 그 동안 직시하지 못했던 인천적 코드의 단면을 그렇게 봄볕에 투과시키고 있던 거였다.
깃발과 플랜카드로 대변되고 있는 인천 지역 서른여덟 곳 개발지역들은 현재 소화불량 상태이다. 새로움과 묵음과의 대치상황인 것이다. 한꺼번에 밀어 닥친 음식물을 처리하느라 버거워 하는 것은 시 행정부뿐만이 아니었다. 불가지적인 경기전망에 대한 섣부른 해법은 요원한 강을 맨 손으로 헤엄쳐 건너는 일과 같다고 시민들 또한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룻밤만 자고나면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길이 새로 생겨나고, 몇 날 며칠을 무심코 지내다 보면 어느 틈엔가 매머드 같은 건물이 우리 곁에 불쑥 들어차는 상황의 연속. 그러다 보니 성취감 보다는 심리적 위축감을 겪는 일이 더 잦아졌기 때문이다.
딸기 아이스크림이 맛 좋다고 주구장창 먹어댄 탓에 된장 맛을 잃어버린 우리 아이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러한 세태에 새로운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라고 귀엣말로 읊조려 주는 동네 어른들은 오리무중 밖에 존재라도 하는 것인지. 대치와 대립의 틈 사이, 아니 이 세상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는 시구에 중독돼 철부지처럼 살아가는 동안 오래된 집 한 채가 또 사라져버린 것이다.
코미디언 고 서영춘 씨가 간들 맞게 목 놓아 부르던 “인천 앞 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 없이는 못 마신다.” 고 했던, 오늘날 칠성 사이다의 원조격인 ‘인천탄산’ 제조사의 건물이 어느 날 갑자기 황망히 사라져버렸다. 1905년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이었지만 ‘인천탄산’이란 이름을 만방에 떨쳐 인경철도 객차의 옆구리에 ‘별표 샴페인 사이다’와 ‘인천탄산수제조소’ 상호를 자랑스레 붙이고 다녔던 원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양날의 칼’ 법칙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 시점에서 가슴이 싸하게 다가오는 허탈감과 모종의 패배감은 쉽사리 감춰지지 않았다. 하기야, 몇 년 전에도 이러한 일들은 종종 인천 연구자들에게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던 문제였었다.
현재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18은행을 보더라도 그랬다. 18은행의 부속 건물로 사용됐던 목조 이 층 건물은 개항당시 일본 건축의 전형이라 할 만치 보존이 잘 돼 있던 사무실 겸용 가옥이었다. 적산가옥을 접수해 개인적 용도로 사용된 이후 과정에서 필자가 목격한 이 건물의 변화 과정은 심드렁 그 자체였다. 무역사무소, 번역 사무실, 모 스탠드 바, 모 슈즈 살롱 등이 그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건축물 지정과정에서 협상의 주체였던 구청과 류 모 씨의 거듭된 난항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철거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허탈감과 패배감의 근저는 이랬다. 우리민족 수난기의 상징들을 문화적으로 극복해 내지 못했다는 현재적 책임감이 그 것이었다.
인천의 지형도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불편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들이 수 없는 바벨탑을 만들어내 하늘을 찌르는 형국이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했던가. 절대 다수의 눈물을 섞어 만든 지상의 모든 경계에 그나마 처절함과 비애로 요약되는 인본주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즈음. 생식기능을 상실한 노새 한 마리가 등짐 하나 가득 뭔가를 싣고서 바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있다.
발기된 채. 아무도 더는,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노랫가락으로 광장이 떠내려가라 외치던 늙은 카수의 배웅을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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