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에 도모지(塗貌紙)란 말이 있다. 얼굴에 젖은 종이를 한 꺼풀 씩 붙이는 행위인데, 일종의 형벌로 사용돼 왔던 것이 변형되어 도무지란 말로 바뀐 말이다. 사전적 표현이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라고 돼 있듯이 ‘도대체’ 정도로 대용하면 그럴 듯하게 쓸 수 있는 말일까 싶다. 요즘 들어서 이런 말을 자주하게 돼 머리말로 옮기게 된 사연인즉. 인천의 모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아 새내기 학습프로그램 가운데 특강 형식을 빈 ‘인천 문화사랑’ 수업을 해왔다. 수업의 성격상 비교과적일 수밖에 없지만,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여느 학과 수업 못지않게 진지했고 성실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의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부정적 이미지는 오히려 긍정을 낳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자위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생각들이 만연해 있을 때에는 불안감이 가슴 쓸어내리듯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도무지’의 출현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앞이 깜깜해 엉킨 실타래조차 풀 수 없는 지경을 두고 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부정은 긍정이 전제된 상태에서 바투 보는 말이다. 긍정이 없는 부정이나 부정이 없는 긍정은, 정체성의 한 몸 되기를 거부하는 편견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인간의 유전적 모순성을 제대로 인식해 왔던 선배제현들의 말씀이 진실에 가까운 충언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하는 말이다. 학생들의 견해는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총체적 문제점을 직관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게 하였다. 전국 대도시 가운데 가장 높은 범죄율이 먼저 거론되었다. 열악한 자연 환경과 교육의 질적 낙후 문제 그리고 부모의 어려운 살림살이로 인한 장래의 우려 등이 인천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 요인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공감의 벽에 머리를 박았다는 점에서 ‘인천 문화사랑’ 수업은 빵점 가까운 등급이었다고 평가받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수업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평해 보았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학생들이 수 없이 토해내는 비판과 편견들의 의중에는 미력하나마 대안을 세우고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성세대들이 거품 물듯 게워내는 대안 없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풍조를 보기 좋게 들배지기 해버리는 통쾌함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무지’는 부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절망의 유령은 분명 아니었다. 진흙을 뒤집어 쓴 채 묵묵히 제 뿌리를 키워나가는 연근처럼 얽히고설킨 끝에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연꽃 같은 메시지였던 거였다. 인천에서 살아간다는 게 연옥 같은 생활일 것이라는 넋두리를 종종 듣게 된다. 고향을 떠나 새 터를 찾아 정을 틔우고, 생면부지 이웃과 띠앗머리 삼고 이삼 십년 동안 살아온 제 2의 고향일진데, 요즘 같으면 살맛 안 난다고 아우성치는 터잡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재래시장 상인들이 그 대표적이다. 재개발 지구로 지정돼 그나마 정 붙이고 살았던 터전을 헐값에 떠넘기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멀쩡한 동네를 싹 쓸어 내어 산업도로를 만들겠다는 불합리한 발상도 문제이다. 어디 이뿐이겠냐 마는, 인천을 둘러싸고 있는 전반적 기류가 매우 불경스럽다는 데에 갯바닥에 삼배구곡을 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지경으로 자존심 상할 일들이 가득하기만 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인천 문화사랑’ 수업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가르침을 받았다. 말랑거리는 여린 입술에서 쏘아 붙이는 정의로운 말이 칼끝보다 두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남의 빨래를 하러 갔다가 내 손이 더 희어진 것과 진배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결론은 이구동성으로 간결했다. 싫다면 안 하면 되고, 좋다면 하면 되고, 내 이웃을 주인처럼 모시면 되고, 살기 좋게 하면 되고.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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