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으신...
찬 바람이 쏠쏠하게 불어대던 십년 전 어느 가을. 멋 내기와 담을 쌓고 살았을 법한 한 중년 부인이 떡집 문을 두드렸다. 허름한 차림새 흰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지만 눈매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떡... , 약밥 좀 맞출 수 있나요? 배달도 해주시죠?” 대뜸 하시는 말씀에 “예. 물론이죠. 근데 얼마나 맞추시려고요” 잰 듯 물으니, “두 되...”. 배달할 수 없다는 말에 “그럼, 찾으러 오죠.” 재차 부탁도 없이 발길을 돌리는 순간, 나는 그 분의 걸음이 편찮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느 덧 흘러간 물이 되어버린 정송화 선생님과의 첫 대면 사건이다. 이 장면을 굳이 사건이라 표현한 데에는, 정송화 선생님께서 가라앉을 만한 그 때의 기억을 여전히 휘젓고 계시기 때문이다. 칼국수 끓여 주시다가, 빈대떡 데워 주시다가도 그 사건을 떠올리며 껄껄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십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이 사건으로 떡은 덕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정송화 선생님은 영락없이 할머니이시다. 어머니 가운데서도 크다고 하는 ‘한’ 어머니이시다. 실컷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부재한 황량하기 그지없는 구도심에서 <골목엔 왜 아이들이 없을까> 라고 의문을 던진다. 십수 년간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동안 우리 사회가 지닌 부덕함을 <촛불 하나만 켭니다> 하듯, 기구하는 이 시대의 할머니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믿음으로 부활하는 <봄>처럼 <쌈 싸먹기>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손자로 다시 탄생하고야 만다. 여느 할머니의 말마따나 지나간 세월의 약은 추억과 손자의 재롱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청개구리의 일기장>은 지난 세월과 미래의 자화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한’ 어머니의 말씀과 같다.
깊은 가을/ 홀로 남은 풀벌레가/ 나직하게 울고 있다/ 남은 생애가 두려워/ 혼자 울고 있다/ 늦가을 저녁에... 이 시 부분에서 ‘남은 생애가 두려워’를 ‘다가오는 추위가 두려워’로 은근슬쩍 고치시는 부군 김구연 선생님의 미소가 갑자기 함지박만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