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談

영종도 2

濟 雲 堂 2008. 9. 30. 13:05

오랜 세월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산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다. 고산준령에서 맑게 게워져 나오는 원천수도 결국엔 바다로 고이게 마련인 것을. 곡절의 세월, 그 더께가 켜켜로 쌓여 갈수록 날카로운 각을 만들며 살아왔던 우리네 인생도 무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바다를 통해서 배운다. 그래서 바다는 평편하다. 눈물과 땀과 바다의 맛이 동일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인천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의 남하 사건에서 비롯된다. 비류가 문학에 도읍을 정하고 치세를 펼쳤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동생 온조에게 백성을 도모케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으로 일단락되는 건국사가 비류의 남하 사건의 전모이다. 백성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통한을 절명으로서 대신한 충직한 됨됨이가, 오늘 날 난잡한 정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다가오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천에 도읍(미추홀)을 정한 이유나 바다를 접해 살아본 경험이 전혀 없던 비류에게 과연, 인천은 어떤 곳으로 비쳐졌기에 한반도 머리끝에서부터 작정하고 내려왔던 것일까.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시대에 사람의 생활상을 증거 해주는 대표적인 흔적들이 바로 패총이다. 조개무지라고도 하는데 비류가 당도하기 훨씬 이전에 인천 전역은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가 꽃 피우고 있던 터전이었다. 강화의 고인돌 무리를 필두로 문학산, 영종의 송산리 유적 등지는 이미 조직력을 앞세운 사람들의 거주지였으며 갯벌을 통해 먹을거리를 충당해 냈던 삶의 텃밭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해서 비류의 인천 정착이 시도되지 않았나 하는 추론이다.

 

 수 세기를 뛰어 넘어 섬으로서 영종도가 우리나라 역사에 숨은 공신 노릇을 담당했던 시기는 고대 백제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372년부터 백여 년간 인천 능허대를 통한 중국 동진과의 교역 시기와 고려 때 송나라와의 조천무역 시기를 통해서 영종도는 가히 국제적인 중간 거점지로서 그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바다는 열려 있었다. 그러나 열려 있는 바다의 공간성에 의로운 일만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었다. 1358년(고려 공민왕 7) 왜구가 인천 연안 화지량(花之梁)에 상륙하여 불을 지른 뒤 약탈해 갔다는 기록이나, 1363년(공민왕 12) 강화 교동에 왜구의 선박 213척이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대의 불안감이 도사리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수도가 각기 개경과 한양이었다는 점에서, 조운선과 수송선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일찍이 군사기지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왕권의 안전을 위해 국가 보장처(保障處)로 지목된 강화로 가기 위한 주요 거점지에 행궁을 설치하게 된다. 조선(인조)의 굴욕이었던 삼전도비(三田渡碑) 사건 이후 인천 해안의 방위 체제에 역점을 두기 시작하는데 그 큰 축이 강화와 영종이었다. 한편, 옛 고지도를 보면 영종을 비롯해 각 도서에 주로 목(牧.군사적 목적으로 말, 소등을 키움)자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들 섬들이 군사 관련 국가시설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의 얼개를 맞추다보면 나라의 정체성 보존에 관련돼 긴장감 넘치는 부분들을 접할 때면 숨 가빠짐을 느끼게 된다. 한숨 고르듯 영종도 전체를 아울러 보면, 애당초 영종도가 하나의 큰 덩지 섬으로 존재해 왔던 것은 아니었다. 구읍 뱃터 즉, 영종포구 일대는 태평암, 백운산을 중심으로 드넓게 차지하고 있는 자연도, 그리고 삼목도, 조천대(朝天臺)와 왕자의 무덤이 있다 해서 왕산리 또는 을왕리, 그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용유도 등이 현재의 영종도를 이루는 주요 기반 섬이었다. 인문학적인 판단이지만 이 섬들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물리어 사람에게 내어준 데에는 사람에 대한 끝없는 헌신과 아낌없는 사랑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설령 그것이 사람의 물욕과 버릴 수 없는 이기심의 멍에일지라도 말이다.

 

 기독교 경전에 ‘빛과 소금’을 빗대어 사람의 역할을 논한 구절이 나온다. 소금의 짠 맛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실제로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아갈 수 있는 생체구조가 아니다. 진화론적 시각에서 사람이 바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소금을 액면 그대로 작은 금(小金)이라고도 말하는 걸 보면, 얼마나 귀했으면 이런 주장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겠는가. 또한 월급생활자의 영문표기 샐러리맨(Salary Man)이 로마시대에 소금(Salt)을 월급으로 줬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봐도 소금의 가치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여하 간에, 1960년대에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른 기반시설 확충 차원에서 신불도와 그 해면이 소금밭이 되기에 이른다. 그나마 이마저도 영종도 신공항 조성공사에 따라서 영종도에서 완전히 퇴출당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비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곡예 하듯 지날 때면, 하얗게 내린 눈밭 같은 모눈종이 염전. 간혹 뙤약볕에 신기루처럼 펼쳐지던 알 수 없는 도시의 잔영들은 더 이상 이 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고만 것이다.

 

 인천은 소금과 매우 밀접한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미추홀 관련 설화를 비롯해, 소금을 푼 간수에 채소를 담그는 과정(침채 沈菜)을 거쳐 만드는 김치. ‘침채’라는 행위과정이 곧 김치라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게 된 유래. 소금을 넣어 만든 김치 가운데, 계절 따라 맛있게 먹는 김치 등을 다양하게 소개한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 인천에서 저술됐다는 것을 보더라도 소금과의 함수관계 즉 바다와의 인접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울러 당시대엔 인천 일대 해안가 여느 가정에서 바닷물을 길어다 끓여 만든 소금을 정부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감시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소금에 빗댄 이야기들이 바닷물처럼 흘러넘치는 곳이 인천이었던 것이다.

 

 아기를 감싸듯 에둘러 섬을 싸고도는 바다의 넓은 가슴은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다. 영종구읍 뱃터를 시작으로 덕기봉 아랫녘 해안도로 일대는 밀물 때에 맞춰 여전히 바다를 낚는 태공들이 진수를 이룬다. 무의도와 실미도, 그리고 잠진도를 바라보며 이슬을 쌓고 산다는 노적봉을 향하면, 왕모래 깔린 왕산해수욕장에서 지친 몸을 풀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입수의 꿈을 못 잊어 반바지만 입은 노인들이 느리게 물살을 헤치는 동안, 어느 새 선녀바위. 삼목 선착장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석산에는 일제강점기에 파헤쳐 놨다는 은 광산, 나라 집을 지으려 심은 나무보호를 위해 입산을 금했다는 금산을 휘돌다보니 영종 구읍 뱃터로 돌아와 있었다. 강화도와 경기만 사이를 빗겨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 이른바 염하의 거센 물을 온몸으로 치받는다 해서 붙여진 물치도(작약도)가 한가롭게 바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영종도 앞 바다는 고요했다. 월미도와 구읍 뱃터를 오가는 정기선의 뒤꽁무니를 어지럽게 뒤쫓는 갈매기들만이 소란스럽게 울어댈 따름이었다. 언감생심이런가. 한 세기 전, 근대의 바다는 엄청난 무력적 위협을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이양선(異樣船)의 대포소리에 경악을 해야 했고 푸른 눈을 가진 거구의 백인들에 놀라 했었다. 영종도와 월미도 사이를 도도하게 흐르는 황해는 아직도 지난날의 생채기가 아물지 않은 채, 절대침묵 속에 잠겨 있는 듯 했다. 독일인 오페르트의 영종 침입 사건, 일본 운요오 호 사건, 미국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로즈 제독 사건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치 영종도 앞 바다를 유린했던 사건들이 파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특히 이 앞바다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은 나라의 자존을 상실케 하는 주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국제항으로서 평판 높던 인천항과 그 인근에 표박돼 있었던 외국 선박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이 장면을 그렸다. 프랑스 파스칼 호, 영국 탈보트 호를 비롯해 그리스, 미국, 네덜란드, 중국 그리고 역사의 희생양이 돼버린 숭가리, 봐략, 코리에츠 호는 영종도 남쪽 팔미도 앞 바다에서 자폭하는 운명을.

 

 세월은 세치 혀를 가진 역사가에 의해서 치유 받지 못한다. 바다 또한 깊은 시간의 주머니에 담긴 아픔들을 일일이 꺼내어 말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종도 앞 바다가 그렇다. 열려 있으므로 더욱 깊다. 그리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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