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로 쓴 仁川(남의 살)

인천항 -최승렬-

濟 雲 堂 2008. 4. 26. 23:05

고달픈 항해에 지친

아메리카 상선이

떠났던 여인들처럼 돌아와 한숨을 쉬면

갈매기 비둘기처럼 띄워서

출영의 메시지를 보내는 월미도 그늘

인천이여

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해후

 

 

부푸는 바다의 가슴 위에

뿌려지는 장밋빛 로맨티시즘으로

숨결은

태평양이 고여 와 일렁이는

더운 조수

벗은 태양이

테이프처럼 나부껴 출렁댄다

그리하여 항구여

너는 필경 바다의 술을 들이킨 보헤미안의

기항지.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서

향수를 병처럼 앓고

미운 사람들끼리라도

진실로 미운 사람들끼리라도

헤어지는 슬픔을 가르치는

에미보다 자비론

뉘우침의 부두를 지녀

 

 

 

신포동 근처를 서성이자면

아무렇게나 모여온 충청도하며 황해도

한국 사투리들이

생활을 오징어처럼 짓씹으며

몸을 사리어 떠나갈 자세더라

인천이여

손수건을 흔드는 것은 너의 버릇이더냐...

 

 

꿈 먹은 넋들이 푸른 깃폭을 달고

해원(해원)에 펄럭이는 출범의 고동이

사랑보다 억세게 핏줄을 흔드는구나

 

 

그렇다 부두에 눈이 펄펄 내리면

테이프 하나 없이라도 너는

이별이 하고 싶은 게다.

 

 

<경기예총>. 1962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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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50

 

최승렬 시인이 인천에 머물게 된 시점은 1959도 이후부터이다

전주에서 태어나 목포 마리아회 고등학교 교감으로 한 때 재직한 이후로는

거의 인천을 중심으로 생활한 분이시다. 물론 1974년 태안여상(현. 태안여고)에서

약 일 년 가량 교장 선생님으로 계셨던 것 외에는

거의 인천에서 여생을 보내신 이력을 갖고 계신다

선배들로부터 듣는 시인 최승렬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 가운데 공통점은

언어학자요, 제물포 고등학교의 국어 선생 그리고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시인이었지만 대외적인 활동을 그리 활발하게 하신 분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그렇지만 청년기에 내가 느끼고 보아왔던 시인 최승렬에 대한 감성은

대단히 정력적이고 정의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82년의 사건이 그렇다. 어리버리한 대학생으로 빈둥거리며

노상을 배회하던 시절. 두 가지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첫번 째가 은성다방 사건?이고 그 두번 째가 이당기념관(以堂記念館) 사건이다

은성다방이 당시 인천 문화예술계에서 내로라하는 건달?들의 집합장소였다면

이당기념관은 이당 김은호를 기념해 유족들이 마련한 곳이었는데

주로 그림 전시를 간헐적으로 열었던 곳으로 역시 인천 건달? 예술인들의

영혼의 거처이기도 했었다.

건달?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 근방에서 장사를 하는 술집과 다방의 마담들의

표현이었음을 옮긴 것이다. 지금은 고로(古老) 취급을 받고 계시지만 내겐

그 분들이 더 없는 인생의 스승과도 같은 분들이고 실증적인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주시는 분들이기도 하다. 그 분들의 당시 표현이 그랬드랬다.

외상 장부에 밑줄 그을 것도 없을 만큼 뻔뻔했지만 넘어설 수 없는 기품과

하대해서는 안 될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애칭 겸 친근감의 발로로 건달이라 했다고 한다

시인 최승렬을 접하게 되는 계기는 이당기념관이 그 처음이었다

 

<략>

이당기념관은 내 기억의 원형질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생채기를 간직한 곳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개칭되었지만 국민학교 4학년 때 짝사랑했던

여자 애네 집으로 멋진 저택과 더불어 잔디와 정원을 제법 넓게 두루고 있어

마음 속으로 동경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공을 차 넣어 들어가기를 

다반사로 했지만 그 애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나의 마음이 빼앗겼던 눈 오는 날의 그 사건. 눈 오는 날 신포동 근방에 살던

치기들은 늘 이 곳에 모여들었었다. 소위 재판소 옆 길부터 일식집 화선장까지

펼쳐진 눈 길은 자가로 만든 썰매나 포대자루를 든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다.

그 집은 눈 길의 첫 출발지인 언덕받이 중턱에 있었다.

그 날도 역시 우리들은 썰매를 타댔고, 아랫길 주택가의 어른들은 부지깽이나

부삽 또는 연탄재를 머리 높이 들어 올려 냅다 눈 길 위에 내려 꽂기를 반복적으로 해대며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장면을 고스란히 응조하듯 바라보던 그 애의 눈과 마주친 것은 친구 아버지(조**)로부터 부지깽이로 허벅다리를

한대 맞고 도망쳐 올라오던 무렵이었다.

새 하얀 쉐터를 입은 하얀 얼굴이 그려낸 듯 웃음지어 보이는 미소를 본 순간

나의 심장은 거침없는 박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저렇게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애가 나를 보고 웃다니...

기이한 인연이었을까. 그 애와는 4학년 6반에 함께 되었고

게다가 짝이 되고부터는

내 인생의 붓질도 서서히 그 서막의 먹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가 너무 에둘러 왔다

문학적 표현들의 거개가 에둘러 온다는 것을 이해하실 요량이라면

한 여름 길게 드리운 황혼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도 이 세상에서 이 만큼 컸으면 좋겠다는 심산이 들어 있다는 것이 잠재돼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 같다

여하튼 시인 최승렬은 과작이라 할 정도로 명성에 비해

그 그늘이 좁다는 것이 아쉬운 분이었다

인천에 와서, 당시 제고 교장으로 계셨던 길영희 선생의 당부에 따라

국어를 가르치게 됐지만 여타의 단체나 모임에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음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댓거리였다

그렇지만 시인의 제자들을 이와 달리 인천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기라성 같은 위치와 그 역량을 펼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선생이라는 그릇은 따로 존재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인천항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말의 씨앗들을 정리해보면

고달픈 항해, 떠났던, 뜨거운 해후를 표현했던 1연

장밋빛 로맨티시즘, 테이프, 보헤미안의 기항지

흘러온 사람들, 향수, 뉘우침의 부두가 2연

그리고 3연과 4연에서

신포동, 황해도, 충청도, 한국사투리, 손수건을 흔드는 것은 너의 버릇이더냐...

해원(海原), 마지막으로 이별이 하고 싶은 게다. 등이 문장구조의 핵심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인천항의 특징을 아니 인천의 정체성을 조근조근하게

시어로 풀어내는 시인은 삼 십대 중반의 연륜에서 얻어낸

이별과 만남의 총체적 인간사를 인천항이라는 시에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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