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유목(都市遊牧)

또 하나의 배움

濟 雲 堂 2008. 3. 3. 10:50

 1. 10여 년 된 사무실에는 다시 또 책들이 쌓여갔다

여러가지 정황들이 어렵게 맞물리다보니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국면했던 것이다.

물론 책에 관한 비상스런 결단을 내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모 대통령 시절인가 보다 서슬도 그런 서슬이 없던 시절에

불심검문에 시달려야 했고, 늘 감시의 그늘에 두려움을 느껴야 했던 그 때

부리나케 모 대학의 재래식 화장실에 수 백 권의 책들을 넣어야 했던 일은

아직도 또렷한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2.책과 인연을 쌓은 지도 벌써 삼 십 년이 족히 넘는 듯하다

만화책이나 종합 만화잡지를 빌려 보던 어릴 때를 제외하고서

직접 사 보기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큰 형님이 입학 선물로 

준 몇 권의 책이었다.

그 책들은 지금 봐도 그 때의 참신함이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었는데

한 편으로는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때 내가 이런 감동을 받았었구나 하는

추억에 휩싸이게 된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 에티에는 질송, 안병욱, 에밀 뒤르껭 등이었다

좀 어렵다 싶었지만 죽어라 이해하고 싶은 욕망에 불을 당긴 건

절대자에 대한 구도, 신을 찾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불타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3. 일주 일 이상 짬짬이 시간 내어 정리해 놓고 보니

잡다한 책을 포함해서 삼천 칠백 여 권이 훌쩍 넘는다

물론 그 안에는 잘 팔리지도 않은 시집과 단행본이 일부 포함돼 있었다

난항이다. 순조롭게 돛 달고 내달리던 지난 날이 얼마나 축복을 받은

날들이었는지 새삼 감회 깊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구미를 맞추는 사무실 구하기도, 진득하니 관리할 사람도 부재한 상황에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은 기류를 느끼는 순간

좀 더 상큼하고, 신선하고, 후회를 최소화 시킬 수 있는

판단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물을 버리자!

物을... 

 

 

 4. 짐을 싸기 시작할 무렵에 가졌던 생각의 조각을 기어이 떼어내고야 만다

건너 방에 똬리를 틀고 앉았던 절반은 이미 누군가의 거친 손에서

자본의 안락을 누리게 되었음이 확인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하고 안타깝고 절망적일 거란 이면의 생각들이

오히려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헌책 방에 연락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분이라면 함부로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탓에

다 싸 놨으니 그냥 가져 가시라고 전한다.

마음이 편하다.

물을 버리니 이렇게 편할 수가...  

 5. 한 편, 아파트 거실 한 면과 안방 두 면에 걸쳐 꽂아 둔

새끼(책)들에게도 생각이 미치는 순간

묘한 미소가 입 꼬리를 귀 밑까지 끌어 올리게 되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차마...라고 위안 섞인 추임새로 떠 보지만 

ㅋㅋ 너희들도 조심해! 라고 읊조리고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는다    

 6. 책을 정리하면서 우연찮게 발견한 쪽지 한 장

초딩 때 썼던 걸로 보이는 혜린의 간절한 요구가 담긴

메모를 보는 순간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핸드폰 영상 편지로 곧바로 보내 놓고는 시공을 넘어 웃음의 바람이

불어 제끼는 훈훈했던 한 시절을 떠 올리는 기쁨을 만끽했다

어디서 찾으셨냐는 혜린의 문자메시지에는

이미 온 몸이 꼬여 어쩔 줄 몰라하는 커다란 암말의 뜀박질처럼

창피하고 부끄러운 말투가 답신으로 전해졌다

 

 7. 간판을 떼면서...

이 거, 죄 짓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속성에 매듭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휴식기를 취하고자 하는 마음인데도 웬지 송구스러움이 복받치는 건

모종의 음모를 스스로 감지해내고 들켜버린 사람 또한 나 스스로 라는 사실에

놀랐던 것일까?

아니면 자본 중심주의 적인 사고에 스스로에게 경각심을 판결한 양심의 가책?

간판을 내렸다. 다시, 어디에 내 걸리게 될지 기대가 되지만

단호함과 비정함, 와신상담과 읍참마소 등등을 떠올리며

지금은 잠룡기(潛龍期)의 때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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