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네에서
김장 담그는 모습을 본다
날씨가 제법 추워야 김장 맛이 난다며
쪼끼에 고무 장갑에 털신 등 중무장?을 하고는
지난 밤에 절여 놓은 배추며 속을 차곡차곡 뭍히고 있다
다들 한 마디 씩 하는 것이
예전에 이 정도는 김장도 아니지 라는 말이었다
그 예전이라는 게 언제적을 말하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금 과장을 해서
수 백 수 천 포기의 김장을 했다는 말인즉
하긴 이런 추억조차 없었던 친구들도 있기는 했다
따지고 보면 김장의 역사는 꽤나 오래된 우리의 습속이다
김장이란 말의 오랜 형태는 침채에서 나온다
침채(沈菜)는 채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채소를 물에 담갔다가
꺼내 보관하거나, 아예 물 속에 저장하는 행윈데
이런 방법들에 가장 중요한 과정은 물에 얼마만큼의 소금을 넣느냐에
따라서 저장된 채소가 맛깔스런 반찬으로 되느냐 안 되느냐가
결정짓게 된다는 점이다
고려시대 인천(부평)에 잠시 거주했던 이규보에 의하면
계절에 따라 침채 즉 김치를 담가 먹었고 어떤 종류의 김치가
맛있다라는 내용을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 전하고 있을 걸 보면
김치라는 공식적인 문서 용어는 아마 이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즐겨 먹는 채소 절임의 역사는 기원 전까지 올라간다
몇년 전 광주에서 발굴된 집단 주거지 화장실?에서
오이를 발효시켜서 만들어 먹은 흔적(포자)이 다량 발굴됐다는 소식은
절임 형식을 거친 채소의 역사가 무척 오래됐음을 단편적이나마
우리에게 알려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먹을 거리에 있어서 역시 중요한 핵심은 소금인가 보다
소금은 역시 금의 작은 형태소를 의미하는 소금(小金)이 아니겠는가
물론 정확치는 않지만 혹자는 소금(素金)이라도 하는데
무엇보다 재미난 사연은 월급을 의미하는 샐러리의 어원이 소금(Salt)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아는 바
얼마나 소중했으면 소금을 월급으로 쳐서 줬다는 로마 시대의 소금이나
명 나라 패망의 원인이 소금 장수들의 전횡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명 나라 정부의 무능 등등의 얘기를 심심찮게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 물론, 먹고 싶어도 즐겨 먹을 수 없는
해외 거주 '우리'들의 입장을 포함해서 김장의 풍속은
매우 바람직한 우리의 먹을 거리 축제라는 생각이다
일본에 가서 작은 병 하나에 4~5천원하는 김치나
미국 엔간한 마켓에서 역시 5천원하는 콧딱지 만한 김치 조각을 먹을 때
우리가 즐겨 먹는 김치의 풍부함에 얼마나 많은 놀라움과 기쁨이
서려 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뿌듯하기만 하다
조선 중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고추 농사 덕에
좀 더 발전된 형태로 변하게 되었지만
역시 세계적인 맛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사진의 배경을 장식하는 나의 애마 둘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게 보인다
발칸(Vulcan)이라는 놈은 몇 년 째 방치해 놨더니
우비 웃도리를 뒤집어 쓴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래도 15년 간을 함께 전국의 구석구석을 달렸던 혈기 왕성한 충마였는데
지금은 노마(老馬)가 다 됐다. 너무나 애지중지했던 터라
가끔 닦고 조이고 기름 칠하고 여름 한 철 만큼은 외출도 시키곤 한다
다음 애마는 다분 영업 목적에 애용하고 있는 놈으로
얼마전에 폐처리된 스쿠터의 대용으로 바꾼 중고이다
오래만에 보는 즐거운 풍경은
나의 맘을 움직이게 했다
즉석에서 참이슬과 팥시루떡을 내어 선물했다
좋아라 한다. 다음에도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하마 했다. 갑자기 애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절인 배추에 속을 넣고 삶은 돼지 고기 한 점을 얹혀
한 입에 물었다. 약간 매운 맛을 삭히려고 달콤한 시루떡으로 입가심 한다
기분 좋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 질질질 입밖으로 새어 나온다
김치국물이 흰 옷에 묻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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