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들춰볼 때마다
오래 묵힌 신문지에 배어 풍겨오는
잉크 냄새가 콧속을 후빈다
헌 책을 펼쳐드니
꽃들이 퉁겨져 나온다
풀 씨들이 날아들고
벌과 나비가 파득거리며
눈 앞에 아른거린다
누군가 헌 책방은 정원이다 라고 말한 대목이 얼핏 스친다
근데 그 누군가가 확실치 않다
내 안을 거쳐간 과거의 내가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속의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갈증을 삭히던
상상 속의 내가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 여덟 살때부터 지금까지
즐겨 찾던 책방이 하나 있는데
그 책방은 수 십년의 세월이 흐르던 말던
예나 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다
헐거운 시간들이 대충 쌓여 있고
나달나달거리는 책 표지가 또 다른 헌 책에 눌려
자칫 스치기라도 하면 째지는 비명이 한 타레 울컥거리듯 쏟아져 버릴 듯
책들로 가꿔진 꽃 밭이다
아무리 정리가 잘 돼 있어도
거긴 헌 책의 방이고 오래된 정원이었다.
동경 간다(神田) 거리는 헌 책방 이 백여 점포가
일본대학과 메이지 대학을 중심점으로 팔방 정비돼 있다
책방거리 축제가 48회를 거듭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꽃 냄새를 맡고 갔구나 생각되니
이 좋은 걸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솟는다
독식 또는 독대의 즐거움을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네
헌 책방 문화와는 사뭇 다른 습속이 자라고 있음을 재차 확인한다
그 안에는 부러움과 시기도 있지만
반성과 염치도 숨은 그림이 되곤한다
태국 방콕 중심부에서 동북 쪽으로 가면
매 주말마다 짜두작 시장이 열리는데
그 곳에서 발견한 우리나라 1960년 대 초딩 교과서를 발견하면서
느꼈던 감정과는 상반된 무엇이,
서울 황학동과 청계천 일대 고서점 거리에서
부산 헌 책방 거리에서 본 치열했던 그 무엇 등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간다 거리 문화 축제였다
그래도 나는 이 거리를 사랑한다
나의 인간적 허무와 구도 그리고 예술적 표현에 대한 갈망들은
이 거리에서부터 출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철 없기도 한 나의 십팔 세에는
이 거리에서 철학과 신을 보려했고 사기치는 걸 배우기도 했었다
어머니께는 정가 얼마의 새 책 값을 디밀고
이 거리에서 헌 자습서를 샀고
교과서를 잃어버렸다고 둘러대고는
다른 욕망으로 나를 채웠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에티에느 질송, 파우스트, 현대사상, 전논(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처음 접했던 시기였으니
고딩 성적이 과연 제대로 나왔을 까만은
나름대로 마음의 보물로 여기고
이제까지 대과 없이 사는 걸 보면
당시의 철 없음이 결코 사기만은 아니었음을
돌아가신 어머니께 이제서야 고해하고 싶다
거리는 道라는 이름을 가진 길이다
길의 주제는 헌 책이고
거리의 道는 길이다
따라서 간다 거리와 배다리 헌 책방 거리는
길이 아니면 道이다
모쪼록 살아 남을 일이다
무조건 살아 있어야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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