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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인천의 옛 이름이다
우리가 '옛'이라는 과거형 접두어를 단어 앞에 놓았을 때는
현재와 다름이란 수식어를 늘 머리 속에 끼워 넣고 다녀야 한다
인간의 뇌구조가 늘 이렇게 복잡성과 다연적 해석이
매사에 적용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부과되는
학습 또는 재활이라는 멍에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던가
삶을 알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인 '사람'은
반복적인 학습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회적 존재로서 그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천형적 존재이다
좀 심했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잘 살아 갈 수 있는데 말이지
키워드, '옛'과 '오늘'이란 말을 끄집어내려고 엉뚱한 얘길 해버렸다
미추홀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여 년 전에 불리던 인천의 이름이다
고구려 시대에 들어서는 매소홀로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는
소성현으로 불려지다가 고려에 이르러 인주, 경원 등으로 불렸다
우리 역사에 인천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조선 조 세조 임금 때였으니 그 역사가 어언 500여 년을 뿌리내린
깊은 내력을 갖게 된다.
참으로 장구한 역사다. 헌데 이렇게 불려지는 지명에도
숨은 뜻이 있어 자못 역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길어질 얘기를 좀 줄여보면 신라 때부터 전국의 지명과 관제가 중국식으로
바뀌어져 순 우리 말이 한자 말에 지배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 조에 인천은 인주(仁州)에서 강등되어 <'''>가 빠져나가 천(川)으로 되는
수모를 겪는 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는 엔간히 역사를 뒤집어 본 바가 있다면 다 아시리라
어쨌든 인천은 비류의 건국, 이자겸의 난의 배후지, 고려 왕궁의
친정지역 등등으로 인해 조선시대부터 줄곧 버림?을 받았던
지역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이런 얘길 하자고 제물포 구락부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아니지만
제물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지리한 설명을 도입해야 했다
우리나라 지도 상에 제물이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조선 중기 무렵이었다.
지방 세곡을 수도인 한양으로 반출할 목적과 인천 주변의 도서 지역의
방목지로부터 또는 해안 경비의 목적 등등이 적용되었던 관계로
'제물'이라는 표기를 사용했으리라 짐작되지만 구체적으로
제물(濟物)이란 표기를 왜 사용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누군가 질문을 해 온다면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해 드리겠지만...)
제물포라는 지명은 이렇게 인천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불려졌다
이런 차에 개항을 하게 되고,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성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인천이라는 말보다, 조선이란 말보다 더 외국에게 알려진 이름이
바로 제물포였던 것이다.
개항은 외국의 문물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문화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위 사진 왼 쪽은 1901년에 지은 '제물포 구락부(CHEMULPO CLUB)'의
초창기 모습이고, 그 오른 쪽은 현재 2007년에 재구성된 건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초기 모습과 현재의 다른 모습을 쉽게 차별해 낼 수도 있지만
전반적인 마감면에서 보더라도 옛 것이
현재의 것보다 더 운치가 있음은 말할나위가 없다.
그러나 운치는 운치일 따름 어느 누구도 이 건물의 속과 사용처를
제대로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특히 조선사람) 없다는 데서 그 운치는
안개 속에 가려진 허상이었던 것이다.
역사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원래 제물포 구락부는 1891년, 이 건물이 자유공원
중턱마루에 세워지기 전에는 현재 동국빌라를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일본식 건물(관동) 그 위치에 있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외국인들은 더 넓고 안정적이고
안락한 공간을 요구하게 되고 이런 욕구가 제물포 구락부(송학동)를 만들게 된
요인이었다. 구락부가 영어 CLUB의 한자말 俱樂部로 차용된 말이라는 것도
이 쯤이면 다들 짐작하실 것이다.
이 제물포 구락부의 용도는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말 할수 있는 사람이 없다
당구대가 설치 됐었다느니. 싸롱처럼 술을 마실 수도 있었고
사교장으로서 댄스홀도 갖췄다느니 등등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받아적기에 불과한 것이다
기실 일본인에 의해서 씌여진 기록에 보면 그렇게 써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여기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그 배제된 이면에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현재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대략 14만 더 넓게는 16만 여 평의
땅은 외국인 거류지로서 조선인이 일체 출입을 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제물포 구락부가 어땠냐느니는 말이 안 된다
이 얘기의 결언은 사실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을
아무런 의식없이 재구성 미화하려는 시행정부의 섣부른 처사에 대해서
그 부당성과 왜곡을 질타하기 위해서였다
인천이 미래 청사진을 세우는데 불필요한 예산과 부조리한 행정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다는 정황을 넘겨볼 수 있는 증거가 바로 제물포
구락부다. 이 건물은 근대시대의 애사이기도 하지만 다시는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증표이기도 하다
엇그제 성대하게 치러진 개관식을 멀찌기 바라보면서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다양한 문화 컨텐츠 또는 부존 자원이 빈약한 기반에서
뭔가를 생산하려는 의지는 높이 사지만 할 땐 하더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이 제물포 구락부로 출발해
1914년 조계지 철폐로 인해 인천에 거주했던 외국인들이 쫓겨나서는
일본재향군인회관으로, 1934년에는 부인회관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에는 미군장교, 사병구락부로 사용돼다가
한국전쟁 후반부터 1990년까지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돼는
이력을 갖게 된다.
필자의 어린 시절 이 건물에 대한 기억은 박물관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매머드(맘모스)의 이빨이 진열장이 보이는,
소박했지만 다정해보였고 걸을 때마다 음산하게 밟혀지는 마루바닥의 기억들
역사라는 걸 어느 누구도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과오가 내일은 정의가 되고
어제의 정의가 내일은 역적으로 변한다는 것도 이미 밝혀진
역사에 대한 얼굴 평이다
나는 오늘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역사에게 물을 일이다
잘 걷고 있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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