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인천, 또 하나의 기억 ‘하나 글로버’

濟 雲 堂 2015. 9. 10. 22:01

    하루가 다르게 도시는 변한다. 오늘의 도시가 어느덧 내일로 달음질치고, 질주하던 도시는, 품이 비좁았는지 미소했던 어제의 기억들을 슬그머니 길바닥에 내려놓는다. 유기되는 것이 어찌 기억뿐이겠는가 마는, 사랑의 감정도 함께 의지했던 열정도 내일로 가는 수레에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불행한 것은 우주의 중심이랄 사람마저 짐짝이 돼버렸다는 것. 섬김과 모심의 전통이 사라진 도시에서 삶은, 그저 집단지능에 의해 사회화되는 개미와 다를 바 없었다. 극단적이지 않은 현실을 극단으로 표현한 데에는, 망원경으로만 봤던 미래를 접안(接眼)으로도 봐야한다는 균형감의 요구였다. 일방적 쏠림이 아닌 다각의 시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소소한 역사 또한 소홀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 글로버(Hana Glover ~1938)는 1871년 9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와 쓰루코 단카와(일명: 쓰루 Tsuruko Dankawa 1848~1899)의 첫딸이었다. 아버지 토마스 글로버는 이미 카가 마키(Kaga Maki)라는 아내가 있지만, 오사카 여행 중에 어린 이혼녀 쓰루를 만나 가족을 이루게 된다. 한 지붕 아래 쓰루의 친자 토미사부로(Tomisaburo Glover 1870~1945)와 알버트(Thomas Albert Glover 1872~1945), 하나(Hana)를 포함 여섯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하나 글로버의 가계를 살피는 이유는 그녀가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쓸쓸히 묻혀 있기도 하지만, 이화양행에 이어 광창양행, 인천의 영국 영사 역을 담당했던 남편 베넷(Walter George Bennett 1863~1944)의 족적도 무시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의 부모가 당대 일본의 핵심권력층, 문화의 핵으로서 두껍게 자리 잡은 이유도 있었다.

 

    ‘일본 근대 산업의 아버지’라는 별명과 ‘떠오르는 태양(이등 훈장)’으로 칭송받던 그녀의 아버지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스코틀랜드 사무라이(Scots Samurai)’였다. 자신의 고향 애버딘(프레이저버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가사키에 서구식 항구를 조성한 것을 필두로 전함과 무기 등을 일본에 들였고, 그가 관여한 다카시마 탄광, 카메야마산쥬(龜山산중)회사, 미쓰비시조선, 기린맥주, 철도, 성당, 주택 등에 ‘일본 최초의 서구식’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젊은 이토 히로부미를 영국에 유학을 주선했을 정도로 일본에 각별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의 위상은 자신의 생가를 기념관(글로버 하우스)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스코틀랜드인 사이에서도 유명하였다. 기린 맥주의 초창기 상표에 그려진 초상을 그의 딸 하나가 그렸다는 것은 양념 같은 이야기다. 어쨌든, 이에 못지않게 쓰루의 일대기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었다. 정치적 견해차로 가족들로부터 무사인 남편과 이혼당한 채 방황하는 17세 유부녀의 기구했던 삶을 20세기적 시각으로 각색한 것이 나비부인이었던 것이다. 근대의 문턱에 선 나가사키를 일약 세계에 알리고 동양의 신비감과 비극의 틈새를 미학으로 승화시켜 도시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데에 일조했음은 물론이었다.

 

   하나 글로버의 부모는 그랬더랬다. 그러나 1896년 나가사키 미나미 야마테 언덕 자신의 집 정원에서 베넷과 결혼식을 올린 후, 생면부지 땅 인천에 첫발을 디뎌 1938년 만석동 외국인 묘지에 묻힐 때까지, 그녀는 인천사람이었으되 인천사람은 아니었다. 1897년에 낳은 첫아들 토마스(Thomas Edmund Bennett~1984), 둘째 허버트(Herbert George Bennett 1899~1983) 셋째 에디스(Edith Eleanor Bennett 1901~1950) 넷째 메이블(Mable Hana Bennett 1903~Unknown) 또한 인천이 고향이었음에도 고향찬가는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긴, 이들은 일찍부터 미국과 영국으로 건너가 결혼했거나 독신으로 살다가 그 땅에 묻혔으니 소식은 요원했었다. 더군다나 남편 베넷조차 하나의 죽음 이후 셋째 딸 에디스와 영국으로 건너가 1944년 런던 근교 미들섹스 묘지에 묻힘에 따라, 하나는 친모 쓰루의 운명과 엇비슷한 운명이라 해도 그럴 법했다.

 

     하나 글로버는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남편은 영국, 아들들은 미국에 막내딸은 행적조차 묘연한 채, 한 많은 중음신(中陰身)으로 인천의 기억 저 편을 기웃거리고 있다. 만석동에서 청학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묘지 이전사의 배후에, 먹으면 게울 줄 모르는 도시의 독성은 여전히 전이되고 있었다. 도시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항간에 청학동 외국인 묘지를 또 이전해야 한다는 구설이 떠돌고 있다. 비교불가겠지만, 일본 근대를 주물렀던 글로버의 딸,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가 기구한 운명적 여인에게 영감을 받아 그린 나비부인의 그 딸,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인천의 경제와 정치사의 한때를 풍미했던 베넷의 아내, 하나 글로버는 인천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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