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고 일할 채비할 때면, 생체 리듬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뱃속부터 시작된다. 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한꺼번에 묶여 있는 신문 뭉치를 들고 쪼그려 앉는다. 수십 년 째 반복되는 행위지만 질리거나 짜증나는 일이 없다. 특히, 화장실에서 뭔가를 먹는 습관은 등교시간 맞추느라 아침 거르기 일쑤였던 내게, 욱여넣듯 먹을거리를 챙겨주셨던 어머니가 그 시작점이었다. 바나나가 귀했을 당시 어디서 구했는지 바나나를, 때때로 떡 한 덩이를 제비 모이 주듯 장소불문하고 입에 넣어주셨던 것이 계기였다. 습관의 견고함은 매로도 다스리지 못한다는 걸 실감했다. 마누라의 성화는 여전했고, 습성을 알고 있는 벗들의 핀잔은 귀곡성(鬼哭聲)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귀곡성은 전통 소리가락 12곡 36성 가운데 득음의 한 경지를 이르는 말인데, 우스개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어이없음의 극이라 놀려대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 하루의 시작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던 습성을 까발리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아서였다.
역병의 창궐에 잔뜩 긴장하는 정국과 소마소마한 일상을 애써 감내하려는 시민들과 의료관계자들이 의연하다 못해 거룩해 보인다. 도시를 지키는 것은 상인 아니면 운전기사라는 말로 대변되는 형국이다. 역병의 시발과 그 파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고 싶지만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받아 놓은 주문들이 취소되고, 각종 행사와 약속들이 미뤄지거나 파기되었다. 불과 며칠이지만 새벽녘 볼일이 아침나절로 바뀌었고 생체 리듬 또한 흐느적거렸다. 일신상의 변화와 바뀐 일상의 불편함은 참을 만 했다. 무엇보다도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참을 수 없었다. 무지로 밖에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분명히 고쳐야 한다’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분명 다른 느낌의 같은 현상일 것이다. 민생을 돌보는 일은 총체적이며 유기적인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만일 위정자로서 무능하다면, 정조 때 서자 신분으로 조선 학문의 최고봉인 규장각에서 일한 이덕무가 ‘치생으로 집안을 보존하는 게 녹봉 받는 것보다 낫다(治生保家 優於干祿)’고 한 말을 진정 가슴에 새겨볼 일이다.
봄이 되면 만화가 꽃 피우고 여름 되면 그늘 드리워진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안다. 상처가 곪으면 고름이 곧 터져 흐를 거란 것도 경험에 의해 알고 있다. 예외가 없다. 관성이란 게 외적 힘이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는 고질적 복지부동 같은 성질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사회의 근간을 시험하는 매우 우려스런 사건들이 매 년 터지고 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역병이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단지 운이 없어서 반복적으로 터져버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지면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가타부타 따지는 것도 불경스러울 뿐더러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지고 영구히 사초로 남을 대상으로 봤을 때, 시대의 회초리를 피할 길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그런 사실(史實)을 알고도 남을 국정책임자는 실상,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은 필자를 비롯해 모두에게 적용되는 범례인데도 독특하고 이상하게 존재하고 있다. 시대의 모든 이단아마저 용서하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속뜻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떨궈버린다. 역풍(歷風)의 관성 적용 대상에서 예외적 존재는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활력의 필살기이자 상쾌한 하루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독자적 화장실 사용법을 공개한 마당이다. 앉은 키 만큼 쌓인 신문더미와 달달 배송된 수십 권의 책과 무릎 높이까지 솟구친 커피 잔. 그 사이 접혀진 지난 신문 한 구탱이에서 ‘역시만필(歷試漫筆)’을 소개하는 기사를 힐끗 본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의 저자가 쓴 신간이다. 역시 신동원이다. 동의보감 이래 의료행위의 실례를 두루두루 실증하듯 기록한 ‘어의 이수귀’의 간덩이 부은 임상기록들이기에 더욱 욕심이 났다. 단박에 헌책방 아벨로 전화를 걸어 언제 입고될지는 모르나, 한 권 챙겨달라고 부탁을 한다. 경험상, 대형서점과 인터넷 책방을 순회한 뒤, 올해 안에 헌책방으로 들어올 거란 확신 때문이다. 까딱하면 그냥 지나칠 뻔한 옥서(玉書)를 오늘도 화장실에서 찾았다. 즐겁다. 그러나 냉랭한 시국에 혼자 낄낄대며 커피를 마시자니 뒤통수가 무겁다. 매우. 느닷없이 마누라가 아래층에서 소리치는 게 들려온다. ‘얼른 내려와, 더러워 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