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우현로 39번 길

濟 雲 堂 2014. 1. 9. 22:09

생경한 거리 이름. 20년 전,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선구자 격인 고유섭 선생 관련 자료를 접했기에 낯설지 않은 호 우현. 터진개 길이라고 이정표를 뜯어 고친지 엇그제 같은데,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개명된 우현로.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은 이 길이 도대체 어디기에 뜬금없는 말만 늘어놓는지 의아해 할지 모른다. 신포시장 아래 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평생 신포동 냄새를 맡고 살아온 필자로서는 헷갈리는 정도를 넘어, 역사와 지명 그리고 추억의 이정표들이 위정자들의 펜대에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개탄스러울 지경이다.

 

개항 각국거리, 러시아 특화거리 등을 조성하겠다며 구와 시가 내놓은 의견도 그렇고 신포시장상권의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주민들과 공청회 내지는 설명회 한 번 없이 추진되는 것 등도 문제이다. 원도심 활성화 방안이라 내 놓은 것인데, 필자가 보기엔 어리숙하고 프로쿠루테스의 침대처럼 생뚱맞아 보이기만 한다. 청관거리와 연계한 상권조성, 신포시장에 비해 침체돼 있는 거리의 활성화에 뜻을 두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기획, 집행하려는 양자의 가슴에 인천, 신포동이라는 역사의 심장이 마비된 채 추진되는 게 아닌지 의심마저 들고 있는 것이다.

 

일미향, 베트남 하우스, 자선소아과, 화신면옥, 인성다방, 대전집, 다복집, 미미집, 신포주점, 유래, 복집, 동경, 답동관, 전화교환소(대동강 2층), 만화가게, 미락, 형제음향, 유토피아 다방, 길정(신한은행), 화선장 등은 필자에게 저장된 6~70년대 이 거리의 면목들이다. 물론 담배 가게와 의상실 등은 차치하더라도 면면이 살피면 256m라는 길이 속에는 불가지적 추억의 인자들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길은 사람을 만들고, 장소와 역사 그리고 미래를 만든다고 했다. 한상억, 최영섭, 조수일, 신태범, 최승렬, 이석인, 김인홍, 최병구, 배인철, 조병화 등에 예술혼을 불어 넣었고 수없이 많은 사연을 낳았으며 그 젖을 빨아 먹고 자란 후배들이 심향으로 삼은 곳도 이 거리이다.

 

한 낮이어도 을씨년스럽고, 깊은 밤 어둠을 쪼개듯 취객들이 게워내는 비명이 이따금 울리는 이 거리가 문제이긴 하다. 몇몇 이름난 식당들이 여전히 고군분투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이러한 문제점의 해결방안으로 개항 각국거리와 러시아 특화거리 조성이라는 책략을 내놓았지만 기대의 반 푼에도 미치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자들이 운영하는 카페 알리바바(사마르칸드)를 보고 아이디어가 제공됐다고 보기도, 과거 각국지인들의 신포동 거리행태 등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생각을 뒤적거려도 마땅한 행적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역사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하며 책임과 비판이 늘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이 거리를 살리겠다는 주장의 이면에 께름칙한 냄새가 풍기는 건, 이 거리의 성질과 성장배경을 근거로 한 합당한 내용이 없다는 데에 있다. 진정한 인천 사람? 차기 선거용 노림수? 무지한 개발론자? 역사의식 부재자? 뭐, 이런 생각들이 불면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필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전선 지중화 공사 예비 단계인지 까뒤집어 놓은 길은 누런 동토로 덮여 있고, 술집을 전전하며 팁도 거절한 채 색소폰 연주를 하던 두툼한 뿔테 안경의 최 씨 할아버지, 그 ‘삑사리’를 닮은 경적이 길의 우려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우현로 39번 길. 그 길 끝에 서서 먼 데 하늘을 보고 있다. ‘백항아리’ 집을 빠져 나온 한 무리의 중년들이 털털한 웃음소리들을 길바닥에 토해내고 있었다. 우수수, 어둠의 나락들이 그 길을 다시 덮고 있다. 정호승의 <봄 길> 말마따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대목이 살별처럼 스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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