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얼(영혼)과 꼴(모양)이란 단어가 합체된 말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그 내면과 성질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얼굴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개인적 호감이나 사회적 친화력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는 게 얼굴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적 판단의 방법일 뿐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유공원은 예로부터 응봉산이라 불렀다. 산의 모양새가 매의 날갯짓을 닮았고 드넓은 황해를 바라보는 형국이어서 지어진 이름인데, 그 근거는 미약하나 그럴 듯하게 붙여진 이름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 산자락 말석에 현재 <성공회 내동교회>와 <성미가엘 복지관>이 둥지를 틀고 있다. 얼핏 보면 여느 교회와 그 복지관에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그 이면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의 얼굴처럼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깊은 내면이 여지없이 숨겨져 있다.
근대 개항기 인천 역사를 한번 쯤 섭렵해 본 사람이라면 이 공간의 역사성과 인문 지리적 중요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 영국 코르프 주교의 선교활동, 젊은 미국인 의사 랜디스의 의술과 영어 학교 개설, 한국전쟁 이후의 석조 재건축 등은 이 공간의 특징을 알려주는 굵직한 키워드가 된다. 그러나 랜디스 박사 사후, 정확히 말하면 러일전쟁 전에 현재의 교회자리는 임시 러시아 영사관이었으며 전쟁 직후에는 일본 적십자 병원 인천지부였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월미 은하레일 인천역과 파라다이스 호텔 사이에 완공한 러시아 영사관과 일본 나가사키 송산松山(마츠야마)에 본부를 둔 적십자 병원이 급박하게 이곳에 설치된 점을 유추해보면 당시의 정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러일전쟁(제물포 해전)의 의미는 한국 근대사에 여러모로 인천의 무게감을 전해주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정치군사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을사늑약에 이어 강제병합의 단초를 마련한 사건이 제물포 해전이기 때문이다. 이에 1864년 체결된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부상자 구호활동의 도의적 선전도구로 인천 적십자 병원이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공회 내동교회에 당시 러시아 병사를 구호한 장소의 의미를 기리는 동판이 러시아에 의해 제작돼 부착되는 사연이 하나 더 붙게 된다.
현재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온 교회와 복지관의 내면에 생생한 역사의 살점들이 한 세기를 넘는 동안에도 현재 진행형인 채 근육을 키워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개항기 서구 의술과 선교의 산실로, 20세기를 통과하는 시점에서 외세의 전장과 전략적 치료소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한 지역의 등불로 역사의 한 획을 그어왔음이 증명되고 있다.
각박하고 급변하는 21세기의 전망과 대안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거울을 통해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된다. 오늘, 늘 보아왔던 교회와 복지관이 새삼 달리 보인다면, 나누는 삶이 많아질수록 행복은 우리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이전의 나의 존재에 대해 좀 더 철저하게 성찰해 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역사이든 자아성찰이든 타인의 존재성이든 간에 관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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